특별한 이야기

170 [작은 예수로 사세요] 옥한흠 목사 소천

행복을 나눕니다 2010. 9. 3. 06:45

 

 




                [작은 예수로 사세요] 옥한흠 목사 소천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향년 72세로 
    9월 2일 오전 8시43분 서울대병원에서. 발인은 6일, 교파 초월 장례위원회 구성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가 2일 오전 8시43분 서울대 병원에서 소천했다. 향년 72세.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3층 1호실.

1938년 경남 거제 출생한 옥한흠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 미국 칼빈 신학교(Th.M)와 웨스터민스터신학교(D.Min)를 졸업했다. 2001년 웨스터민스터신학교는 제자훈련을 통해 한국교회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여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1972년 목사안수를 받고 1978년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교회를 개척하여 제자훈련 목회로 수천 명의 평신도 리더가 함께 뛰는 건강한 교회를 일구어 냈으며 교회가 목사와 함께 늙으면 안 된다는 소박한 신념으로 조기 은퇴를 결심, 성공적인 사역 계승의 모범을 보인 목회자이다.

목회현장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국제제자훈련원장으로 섬기며 한국교회의 영적 멘토이자 제자훈련 목회의 산 증인으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제자훈련 사역을 이끌었다. 또한 우리나라 복음주의 진영의 장형으로서 ‘교회 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명예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직전회장 등 중책을 맡아 섬기며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치, 성숙을 위해 일생을 헌신 하며 섬겨 왔다.

그의 목회철학과 열정이 담긴 저서『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는 한국 교회의 스테디셀러로 한국교회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그 외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안아주심』 등 총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유족으로는 김영순 사모와 성호(成浩) 승훈(昇勳) 성수(成洙) 3남을 두고 있다.

<경력>
사랑의교회 담임목사(1978~2003)
한국OM국제선교회 이사장(1989~2005)
연변과학기술대학 대표이사(1992~2006)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 대표회장(1996~2007)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1998~2007)
사랑의교회 원로목사(2004)
국제제자훈련원 원장(1986)
한국OM국제선교회 명예이사장(2005)
연변과학기술대학 설립이사장(2006)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 명예회장(2007)
한국 기독교 목회자협의회 명예회장(2007)

학력
성균관대학교 문리대학 영문학과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캘빈신학교 신학석사(Th.M)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박사(D.Min)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명예신학박사(D.D)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실천신학박사 뉴스파원 김철영

*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 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제2, 제3의 옥한흠이 필요합니다"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 수석, CCC 박성민 대표, 이정익 목사 등 조문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2일 오전 옥한흠 목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랑의교회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단을 받고 있다. 빈소에는 옥 목사의 장남 옥성호 집사와 오정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가 조문단을 영접하고 있다.

오후 1시 35분에는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 수석이 빈소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이어 단체로는 처음으로 CCC 박성민 대표와 간사들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박성민 목사는 "지난해 9월 29일 김준곤 목사님 소천 때 제일 먼저 달려오셔서 '제2, 제3의 김준곤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약해져 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제2, 제3의 옥한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교회가 정체되고 힘이 들 때 옥 목사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다."고 고인의 소천을 안타까워했다.

"옥 목사님은 곧으신 분이었다."고 회상한 박 목사는 "평생을 통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타협치 않고 행하신 분이었다. 그런면에서 제자훈련은 쉽지 않다. 제자훈련에서는 먼저 본이 되는 삶을 사셨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자상하시고 세심하셨다."고 생전의 고인의 삶을 추모했다.

이밖에도 숭실대 기독교학과 김회권 교수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의 사랑을 받았던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국제제자훈련원 김명호 목사 등이 빈소를 지켰다. 이어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가 조문했다. 사랑의교회 교인들의 발걸음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후 4시 경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전병호 목사와 총무 권오성 목사가 빈소를 방문해 조문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논평을 내고 제자훈련으로 수천 명의 평신도 리더를 세워 건강한 교회를 일구는데 노력하였고, 교회의 갱신과 일치, 성숙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산 고인을 추모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고 옥한흠 목사는 1978년 서초동에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여 2003년 오정현 목사를 후임자로 세울 때까지 25년간, 한국교회의 영적 멘토이자, 제자훈련 목회의 개척자요 산 증인으로 살아왔다. 이를 통하여 옥 목사는 한국교회에 끊임없는 도전과 성숙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고 추모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또 “ 목사는 교회가 건강하기를 늘 염원하였는데,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를 통하여 교회와 목회자가 늘 새로워지기를 격려하고, 종교의 정치 권력화를 경계했으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통하여는 한국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 애썼다."고 추모했다. 이어 “고 옥한흠 목사가 선언하고 지향하였던 목회 철학과 삶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예수 제자 됨의 아름다운 전형으로, 또 다른 ‘옥한흠 목사’가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대 한다.”고 밝혔다.

한편 입관예배는 3일 오전 10시, 발인식은 6일 오전 9시 반에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서 드린다. 천국환송예배는 11시 사랑의교회당에서 드린다.ⓒ 뉴스파워 성상현

제자훈련에 목숨 걸었던 옥한흠 목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 세상을 바꾸는 기적 꿈꿔"


“한국교회가 세계를 위해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한국 교회가 세계를 위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우리의 비전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날이 오면 교회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서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는 1978년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교회를 개척해 제자훈련 목회로 수천 명의 평신도 리더를 길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교회가 목사와 함께 늙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조기 은퇴를 결심함은 물론 세습과 변칙세습이 난무하던 때에 무난한 리더십의 계승을 보여줘 존경을 한 눈에 받았다.

제자훈련에 미쳤던 예수의 제자

부인인 김영순 사모는 옥 목사에 대해 “제자 훈련에 미쳤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그가 제자훈련에 몰두했던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집에 들어와서는 잠만 잘 정도였다. 아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그 흔한 태권도학원도 보내지 못하고, 가족끼리 바닷가는커녕 집 뒤 남산에도 한번 못 가봤다는 게 김 사모의 설명이다.

옥 목사가 <예수 믿는 가정 무엇이 다른가?>라는 책을 냈을 때, 둘째 아들 승훈씨는 "아버지는 그런 책을 낼 자격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쉽고 편한 길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택했던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순장으로 활동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평소 옥 목사는 “나는 당신이 아니면 목회를 못했을 것”이라며 “당신이 옆에 있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그녀에게 말해 왔었다.

김영순 사모는 “많은 일을 했지만, 그래도 겸손함을 지닌 남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다시 태어나도 옥한흠 목사와 결혼해야지 다른 사람하고는 못살 것 같다”고 전했다.

“여기에 교회 하면 아무도 안 와요”
사랑의교회의 전신인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할 때 들었던 말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목회를 하다가 떠나는 서울대 출신의 목사가 던진 충고였다. 버스는 20분에 한 대 꼴로 다녔고 주변엔 온통 초라한 여관들뿐이었다.

사람들에게 “저 아래 있는 필리핀 대사관에 가서 선교한다면 모를까 여긴 교회가 될 것이 아니다"라는 걱정과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에 옥 목사는 “한 사람이라도 제자훈련을 해서 투철한 소명자로 만들면 기적이 일어나겠거니 하는 단순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우려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1978년 7월 23일 드디어 창립예배가 드려졌고,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성도들이 있었다. 교회개척의 감격보다는 고생할 목사가 측은해서 우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나 옥 목사는 이날의 평온한 마음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에는 놀라운 평안함과 기쁨이 자립잡고 있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한 흡족한 심정이랄까, 배불리 젖을 먹고 난 어린아이의 평안함이랄까, 그런 신비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평신도를 훈련하고 소명자로 일깨우는 일을 목회의 비전으로 두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밝혔던 옥 목사는 결국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옥 목사는 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서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을 확신했는데, 이것은 결국 그의 기도를 기억하는 이들의 몫이 됐다. 뉴스파워 이범진

"옥 목사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신 분"
하용조 목사, "통일을 위해 매일 중보기도하신 분"

7월 25일부터 트위터에 옥한흠 목사를 사모하는 글을 올린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는 7월 30일 “그는 진정 우리 시대의 스승입니다. 샬롬”이라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글을 맺었다.

다음은 하용조 목사가 트위터에 올린 옥한흠 목사의 회복을 기원하면서 쓴 글 전문이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 시대의 스승입니다. 목사님은 이 땅의 교회를 죽을 만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처럼 모든 한국 교회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감싸신 분이십니다.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습다.

그는 한국 교회가 한국 교회가 하나되기를 원하셨고 한국 사회의 견인차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민족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통일을 위해 매일 중보기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흥분하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말을 하거나 표정을 내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만나보면 얼마나 나라 걱정을 하시는지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소유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셨습니다. 그는 진시로 겸손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사모님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언제나 사모님을 대동하고 다니시고 자녀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목사님은 바지가 구겨지거나 머리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정도를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진정 우리 시대의 스승입니다. 샬롬!"

현재 일본 동경에 머물고 있는 하용조 목사는 옥한흠 목사가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7월 10일 트워터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찾아뵙지 못합니다.”며 안타까움을 타나내고 “내가 하와이에서 안식년 할 때 목사님은 아무 이유 없이 전화해 주시곤 했었죠. 잘 있냐고. 쉬면서 일하라고 하시던 목사님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벌떡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설교를 들려주십시오.”라며 회복을 기원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사랑의교회 관계자에 따르면 옥한흠 목사는 병세가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의사들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뉴스파워 김철영

평신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란 취지로 제자훈련
2010-09-02 11:25 2010-09-02 16:34


사랑의교회는 2006년 폐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옥한흠 목사가 지난달 8일 새벽부터 폐렴으로 인한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치료를 받았으나 2일 오전 8시43분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옥한흠 목사는 193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캘빈신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목사안수를 받은 옥 목사는 1978년 서초동에 사랑의교회(예장 합동)를 개척해 현재 재적교인 8만 명, 출석교인 4만 5000명에 달하는 대형 교회로 키워냈다.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취지로 평신도의 영성을 일깨우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고 다른 교파 목회자들에게도 널리 전파해 한국복음주의 교회를 이끄는 큰 어른으로 존경받아왔다.

특히 정년을 5년 남긴 65세 때인 2003년 말에는 미국 남가주 사랑의교회에 있던 오정현 목사에게 넘겨주고 조기 은퇴를 단행, 개신교계의 문제점이던 담임목사직의 일가 세습 관행을 깨뜨렸다.

옥 목사는 소년소녀 가장돕기, 북한 어린이돕기, 장애인선교, 호스피스 선교 등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펼쳤으며, 한국교회가 후원해 설립한 연변과학기술대학 명예이사장도 맡았다.

하지만 그가 이끌던 사랑의교회는 지난해 서초동 법원청사 인근에 2100억 원을 들여 대규모 예배당을 신축하는 문제로 사회적 논란을 낳기도 했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의 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저서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1984년)를 비롯해 '하늘 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안아주심'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고, 1986년에 설립한 국제제자훈련원을 은퇴 이후에도 이끌면서 제자훈련에 힘썼다. 옥 목사의 호는 은보(恩步)다.

유족은 부인 김영순씨와 성호, 승훈, 성수 등 3남이 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1호실에 마련됐다. 서초동 사랑의교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의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도 2일 저녁부터 조문을 받는다.

발인(천국환송예배)은 6일 오전 11시 사랑의교회에서 진행되며 장지는 안성시 양성면이다. ☎02-3480-6501¤2. 동아일보 인터넷뉴스팀


품격 있는 설교, 숱한 목회자들의 역할모델
2010.09.02 10:35 입력 / 2010.09.02 15:10 수정

(서울=연합뉴스) 옥한흠(玉漢欽)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사랑의교회는 2006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옥한흠 목사가 지난달 8일 새벽부터 폐렴으로 인한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2일 오전 8시43분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72세.

국내 대표적인 대형 교회 중 한 곳인 서초동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옥한흠(玉漢欽) 원로목사가 2일 소천 했다. 향년 72세.

사랑의교회는 2006년 폐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옥한흠 목사가 지난달 8일 새벽부터 폐렴으로 인한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치료를 받았으나 2일 오전 8시43분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옥한흠 목사는 193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캘빈신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목사안수를 받은 옥 목사는 1978년 서초동에 사랑의교회(예장 합동)를 개척해 현재 재적교인 8만명, 출석교인 4만 5천 명에 달하는 대형 교회로 키워냈다.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취지로 평신도의 영성을 일깨우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고 다른 교파 목회자들에게도 널리 전파해 한국복음주의 교회를 이끄는 큰 어른으로 존경받아왔다.

복음주의 신학으로 무장한 옥 목사는 철저히 성경중심적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의 실천방안까지 제시하는 진지하고 품격 있는 설교로 많은 평신도들을 흡입했으며, 숱한 목회자들의 역할모델로 추앙 받았다.

특히 정년을 5년 남긴 65세 때인 2003년 말에는 미국 남가주사랑의교회에 있던 오정현 목사에게 넘겨주고 조기 은퇴를 단행, 개신교계의 문제점이던 담임목사직의 일가 세습 관행을 깨뜨려 다시 한번 존경을 받았다.

옥 목사는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한국기독교교회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등을 지내면서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개혁을 위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울러 소년소녀 가장돕기, 북한 어린이돕기, 장애인선교, 호스피스 선교 등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펼쳤으며, 한국교회가 후원해 설립한 연변과학기술대학 명예이사장도 맡았다.

하지만 그가 이끌던 사랑의교회는 지난해 서초동 법원청사 인근에 2천 100억 원을 들여 대규모 예배당을 신축하는 문제로 사회적 논란을 낳기도 했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의 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저서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1984년)를 비롯해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안아주심'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고, 1986년에 설립한 국제제자훈련원을 은퇴 이후에도 이끌면서 제자훈련에 힘썼다. 1997년부터는 취미로 사진촬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옥 목사의 호는 은보(恩步)다.

유족은 부인 김영순씨와 성호, 승훈, 성수 등 3남이 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1호실에 마련됐다. 서초동 사랑의교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의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도 2일 저녁부터 조문을 받는다.

발인(천국환송예배)은 6일 오전 11시 사랑의교회에서 진행되며 장지는 안성시 양성면이다. ☎02-3480-6501∼2. (연합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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