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만나셨나요?
1호선 샌드위치 연인. 고단하고 바쁜 세상, 용기와 희망 끼워 팝니다
24일 오전. 김훈 씨가 시청 역 4번 출구 프레스센터 옆에서 샌드위치를 팔고 있다. 김씨는 "힘들기도 하지만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용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발걸음이 분주한 출근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앞을 지나다 보면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한 번쯤 고개를 돌리게 된다. "안녕하세요? 집에서 만든 신선하고 깨끗한 샌드위치 사세요" 하고 우렁차게 소리를 내지르며 샌드위치를 파는 김 훈(30)씨가 그 주인공이다.
김씨는 4번 출구에서, 그의 여자친구 임인애(30)씨는 3번 출구에서 주중 오전 7시~10시에 샌드위치를 판다. 이 연인의 아침은 남보다 이르다.
새벽마다 김씨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임씨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김씨는 포장을 한다. 완성된 샌드위치를 아이스박스에 나누어 담은 뒤 나란히 지하철을 탄다.
여자친구 임인애 씨와 함께 한 김훈 씨. 김씨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데 함께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짠한 마음을 표현했다.
김씨가 샌드위치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6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뒤다.
회사 사정도 어려운 데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찾을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다.
수줍음 많은 여자친구 임씨도 용기를 내어 합류했다. 유치원 교사였던 임씨는 암 투병을 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유치원을 그만 둔 상태였다.
간병으로 심신이 지쳐 아이들과 웃고 놀아주는 것이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훈이 씨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 실의에 빠진 제게 큰 격려가 되었어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사를 나선 뒤 제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임씨)
아직은 초보 장사이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다. 산지 직송 여주 밤고구마, 경북 능금사과 등 신선한 재료만 쓴다. 방부제는 물론 조미료도 쓰지 않는다.
심지어 소금도 넣지 않는다.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주신 것처럼 깨끗하고 안전한 샌드위치만 판다.
간단해 보이지만 샌드위치 하나 만드는데 식빵부터 케이스까지 재료가 11가지나 필요하다. 한 가지라도 부실하면 금방 맛이 달라진다. 장보기부터 포장까지 수도 없이 손이 간다.
"직접 만들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노하우를 매일 배워요. 감자가 제일 상하기 쉽다던가, 마요네즈는 마지막에 넣는 것이 좋다던가 하는 것들요."(김씨)
출근길에 이런 정직한 젊음을 보며 용기를 얻는 사람도 많은 듯 하다. 취업 준비생이라고 밝힌 한 여대생이 샌드위치를 사고 김씨의 손에 쪽지 한 장을 쥐어준 적도 있었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니 무기력해지고 우울했는데 '샌드위치 사세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다시 기운 내서 도전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난달에는 김씨 앞에 외제차가 하나 서더니 어떤 남성이 책을 하나 건네주기도 했다. 책 속에는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차마 그 돈을 쓸 수 없었던 김씨는 샌드위치 3만원 어치를 만들어 동네 양로원 노인들에게 전해 드렸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리다가 2000원을 김씨 손에 쥐어 주고 뛰어가 버리는 아저씨도 있다. 샌드위치를 드리려고 하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지하도를 건너 바람처럼 사라진다. 항상 건너편 성당으로 달려가는 이 아저씨를 김씨 커플은 '추리닝 신부님'이라고 부른다.
가장 기뻤던 날은 샌드위치 51개를 팔았던 날.
둘이서 평균 40개가량을 팔고 남은 샌드위치는 주변 노숙자나 동네 노인들에게 나누어 드린다.
김씨와 임씨가 처음부터 장사를 잘 했던 것은 아니다. 샌드위치 장사를 하겠다고 거리로 나온 첫 날, 세종문화회관, 오피스텔 경희궁의 아침, 배재대학교를 돌아다니며 탐색했으나 결국 자리를 잡지 못 했다.
출근 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프레스센터 앞 신문 게시판 앞에 겨우 자리를 잡고 섰으나 "샌드위치 사세요"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포장케이스를 어디서 사는지 몰라 랩으로 싸서 쭈글쭈글해진 샌드위치를 앞에 두고 눈물이 핑 돌았다.
"구걸이 아니라 장사를 하러 나온 것인데 내가 팔고자 하는 제품이 너무 초라했어요. 이 일을 해 낼 수 있을까 좌절감이 밀려왔어요."(김훈)
그 날 거의 팔지도 못하고 남은 샌드위치는 김씨의 어머니가 전부 샀다.
김씨와 서로 타협을 보았다. 될 수 있는 한 아주머니와 거리를 두고 샌드위치를 팔고 몸이 아픈 아주머니가 늦으시는 날엔 아주머니 자리를 맡아 주기도 한다.
요즘에는 아주머니가 장사 노하우를 귀띔해주실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춥고 다리도 아프지만 무엇보다 창피함을 이기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우물우물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다잡았어요. 나는 오늘 샌드위치 몇 개를 팔겠다 하는 그 목표만 생각하기로 했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창피함이 사라지고 목소리는 커졌어요."(김훈)
김씨는 요즘 생전 안 보던 요리책도 보고 마케팅 책도 보며 '장사 고수'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한다. 조만간 저녁에는 호떡 장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김씨의 꿈은 거리에서 온 몸으로 배운 장사 노하우를 살려 임씨와 가게를 내는 것.
"인애가 플로리스트 과정을 공부하는 중이예요. 돈을 벌어 예쁜 꽃가게를 차려주고 결혼도 얼른 하고 싶어요." (김훈)
불황이다. 누구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누구는 일자리를 잃을까 봐 힘들다.
샌드위치에 '용기'와 '희망'이 담겨서일까. 김씨의 샌드위치는 속이 든든하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사진-삽나무 분재)
* .......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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