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9 최고로 든든한 빽

행복을 나눕니다 2008. 1. 8. 12:17

 

 

 성공한 사람 뒤에는 언제나 든든한 빽이 있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그리고 날마다 기도하신 어머니 가 빽
기도는 형식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

 

당신의 뒷 배경은 누구인가?
권력자나 재력가가 빽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 하나님이 당신의 빽이면 제일 좋다
그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로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다
부모 형제면 더 좋고 아니라도 기도 해 주는 분이 계시면 좋은 것이다.
(시편 126편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이명박 당선자의 빽(배경)을 보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소년 시절 포항 시내 움막집 비슷한 단칸방에서 자랐다. 사춘기 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 낮에는 어머니의 행상을 돕고, 밤에는 동지상고 야간부를 다녔다.

이 당선자의 어머니 채태원씨(1964년 작고)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원래 어머니의 친정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시집을 와서 7남매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포항제일 교회를 다녔고, 새벽 예배를 하루도 빠지지 않는 신실한 신앙심으로 가난의 질곡을 헤쳐 나갔다.

이웃에 살면서 이 당선자 어머니를 직접 보아 온 김현호씨(69 포항제일교회 장로. 포항대동고 교장)는 채태원 씨의 새벽기도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성경책과 군용 담요를 들고 포항제일교회 예배당에 나가 밤새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겨울에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도 모습은 지금도 선하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 분의 기도 제목이 자녀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녀가 잘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도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자 스승이 가난과 어머니라고 했다.

 

당선자의 어머니는 가족끼리 매일 새벽기도도 드렸다.
그 때문에 이 당선자의 형제자매들은 매일 새벽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며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어머니는 가족들과 한자리에서 드리는 새벽기도에서

가장 먼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고 그런 뒤 7남매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다.

 

어머니의 기도 속에 신앙으로 자란 이 당선자는 고비가 닥칠 때마다 기도로 헤쳐 나갔고, 그 결과 모두 올바른 결과를 가져왔다.

 

이 당선자의 어머니 채태원씨는 이 당선자가 고려대 재학 시절 6.3사건에 연루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다 석방된 1964년 겨울 작고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복역할 때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찾아와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대로 행동하라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가 평생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릎 꿇고 드린 기도가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회 부의장 이라는 두 아들을 만들어 냈다.

모자(母子)는 낮엔 풀빵, 뻥튀기, 사과 등을 팔았다.

아들은 밤늦도록 호롱 불 아래서 책을 읽었으며, 새벽엔 깨어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했다. 주일은 교회 일까지 맡았다.

 

어머니의 기도는 복잡하지 않았다.

5남매가 기도 순서를 다 외울 정도였다.
행상을 다니면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예수 믿게 해 달라는 전도의 기도를 드렸다.

 

또 어느 부잣집 아들이 몸이 아파 학교를 못 가면 그 아들이 빨리 나아서 학교를 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짧은 기도로 끝났다.
명박이는 건강하고 예수 잘 믿게 해주세요. 5형제들은 커서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채 집사를 닮아 모두 4시만 되면 언제나 눈을 떴다.

몸은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의 영향은 그만큼 컸다.

어머니가 한 기도는 모두 이뤄졌다.

 

형제들은 늦게라도 대학을 졸업했으며 모두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당선자처럼 가난 속에 자란 친형 이상득 국회 부의장(72)은 코오롱그룹 사장을 지냈고 5선 국회의원에 현재 국회 부의장이 됐다. 

 

10년 전에 선교사가 된 막냇동생 귀분(61)은 동남아에서 선교 활동 중이다.

김광웅 목사(포항 제일교회 담임)는 부모의 간절한 기도는 자녀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면서

부모들의 올바른 신앙생활과 자녀를 위한 기도가 내일의 훌륭한 일꾼을 만드는 소중한 열매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포항CBS 조중의 기자 jijo@cbs.co.kr ---
 
* 당선자 주변 사람들 이야기

 

이 당선자의 누나는
어머니가 그 옛날 단칸방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린 박이를 옆에 무릎 꿇리고 함께 드렸던 새벽기도가 오늘의 대통령을 만들었어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큰누나 이귀선(68 구룡포 교회) 권사는 구룡포동 자택에서 19일 오후 당선이 확정되자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면서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경주이씨 문중의 최대 잔치가 된 당선자의 고향(포항시 흥해읍 덕성1리) 마을회관에서는 400여명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흥겨워했다.

 

나이는 한 살 더 많지만 7촌 조카뻘 되는 이용주(68 포항 중부교회) 장로는 내 안카더나 꼭 될끼라꼬. 하나님이 아제(아저씨)를 크게 쓰실 줄 진작 알아봤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동지상고 야간부 출신 동기생 강원구(67 포항 우현교회) 장로는 잠긴 목소리로 친구 자랑에 끝이 없었다.

이 당선자의 동기생들 중 확인된 목사와 장로만 10명이 넘는다.
특히 포항 동빈동에 모인 야간부 출신 동기생 13명의 기쁨은 남달랐다.

노점상을 하며 야간부 상고를 나와 대학까지 졸업한 대통령은 역사에도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동기생들도 야간부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오늘부터 한방에 날리게 돼 50년여 묵은 체증이 확 풀렸다고 털어놓았다.

 

서울 마포 대농 빌딩에서 명(이명박)사랑 중앙회를 이끌고 있는 김창대(67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반백년을 동고동락하며 분신같이 살아온 죽마고우다.

포기하지 말라,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지 말라. 김 장로는 이 당선자는 평생 동안 포기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며 그는 잘한 일보다 못한 일에서 좌우명을 찾는 사람이다.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 많았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내 친구라고 말했다. 포항= 글 윤중식,사진 강민석 기자 yunjs@kmib.co.kr (국민일보)

 

* 이 당선자 의 말

 

가장 존경하는 CEO는 예수
샐러리맨 신화 그 치열한 삶을 통해 배운 진정한 리더십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그는 오직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들은 이명박을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화는 그것을 신화라고 부르는 밖에서 보는 이들만의 신화일 뿐이다.

그의 인생은 가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치열한 위기의 삶이었다.

 

해방된 조국을 찾아 고향 마을로 돌아온 가족에게 맞이한 것은 혹독한 가난과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은 물러설 줄 몰랐다.

 

학창시절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해야만 했고 야간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해 빈손으로 상경해 달동네 일당 노동자가 되었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재래 시장을 청소하며 학비를 벌었고 6.3사태 주동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에 입사해 30대에 사장이 되고 40대에 회장,

두 번의 국회의원을 거쳐 서울 시장, 그리고 결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행정 수반의 자리에 올랐다.

 

겹겹의 위기와 안팎의 도전들로 둘러싸인 냉혹한 현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 나간 그의 삶은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성공신화로 비춰지곤 한다. 하지만 치열한 삶의 여정 그 진짜 이면에는 그가 온몸으로 품어낸 보석, 바로 예수를 닮은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헌신의 솔선을 보인 진정한 리더.

단칸방에 살며 재래 시장 생선 가게 앞에서 바구니에 생선 몇 토막을 팔면서도 사람됨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에게 헌신의 솔선을 보인 진정한 리더였다.

 

간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맨몸으로 올라와 낮에는 일용 노동자로 일을 하며 밤에는 청계천의 헌책방을 오가며 공부했다. 대학에 합격만 하면 중퇴를 하더라도 고졸보다는 나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대학으로 가야 할지 몰라 종로 학원가의 한 친구를 따라 무작정 고려대 경영학과 원서를 넣었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자신은 붙어버렸다.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서 어머니께 전했는데 기뻐하신 것도 잠시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등록금과 입학금 걱정 때문이었다. 시험만 친 것이라고 위로하는 그를 어머니는 며칠 뒤 급히 부르셨다. 시장 환경 미화원으로 일하면 시장 사람들이 힘을 모아 6개월 간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이는 것, 21세기 리더십은 헌신적이야 한다는 그에게 먼저 앞장서서 봉사하고 솔선하는 삶은 그가 어머니께로부터 배운 예수의 리더십이었다.

 

힘있는 사람의 용서야말로 진짜 용서
서울 시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 사람은 봉투 안에 청계천 복원 공약을 내세울 당시 반대하고, 여당 후보 사무실에서 선거 운동 했던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들을 쳐 내야 시장 직을 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황 스러운 마음에 일단 거절했지만 이틀, 사흘 계속 찾아왔다. 열어서 보기라도 하라는 걸 끝까지 거절했다.

결국 잘 한 것이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취임 후 1년 만에 복원 사업을 착공하고 2년 3개월만의 완공은 일류 민간 기업의 속도와 대등할 정도로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다. 하나같이 열심을 다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이들 중에 복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봉투를 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 저 사람은 상대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이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상대 후보에게까지 도움을 줄 정도였다면 상당히 우수한 실력의 공직자였을 텐데. 반대했던 사람과 찬성했던 사람 모두 힘을 모아 일했기에 어려운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용서를 깨달았다. 세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힘을 나쁜 곳에 사용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복잡해지겠는가. 힘있는 사람의 용서야말로 진짜 용서라는 깨달음은 그가 배운 또 하나의 예수의 리더십이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사명을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 비록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그 길을 통해 성장하게 하셨다고 믿는다.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는 22만 명의 상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야당 시장인 그에게는 흔한 공권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어 오로지 말로 설득할 뿐이었다.

 

서울시 공직자들이 생존권을 담보로 내세우는 상인들을 만나 설득한 횟수만 4천2백 번에 달한다. 물질적인 보상도 문서로 하는 약속도 없었다.

하지만 또 만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진심이 통하고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결국엔 결사 반대를 외치며 목숨을 걸고 막았던 상인 대표가 감사패까지 전달해 오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는 결코 나 혼자의 힘으로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주어진 소명 중에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럴 때일수록 그는 리더에서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기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을 때 전기를 유용하게 쓸 수 있듯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류는 믿음이란 전원에서만 유일하게 흐르기 때문이다. 오직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외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CEO는 예수라고.

(참고: 믿음으로 성공한 이 시대의 사람들 내가 가장 존경하는 CEO 예수
(이명박 著.2006) <가이드포스트>)

 

* 이명박 당선자 형편 정리하면

 

2007년 12월 19일 오후8시. 이명박 후보가 제 17대 대통령으로 확정되는 순간,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그를 비췄다.
오후 12시, 531만 표 차로 사상 유례 없는 압승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언론사들은 일제히 그의 과거 사진들과 경력들을 함축해서 보도하며 심지어는 초등학교 학생 기록부에 나온 출석 기록까지도 기재할만큼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초점이 됐다.

 

그러나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는 한결같은 신앙심으로 지독한 가난을 헤쳐 온 어머니(故채태원씨)가 큰산처럼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명박 당선자는 교회에서 간증을 할 때마다 어머니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낸 집은 단칸방에다

 

가족 7명이 끼여 살아야 했던 절 터였다. 옆 집에 사는 거지를 부러워 할 만큼 그와 가족들은 가난의 비참함 속에 살았다.

 

그러나 새벽 4시. 행상으로 품을 팔던 어머니는 그 시각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와 형제들은 20여 년을 어머니의 이 한결같은 기도를 듣고 자랐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막내아들도 그냥 재워 놓지 않았다. 깨워 엎드려서 다리를 접혀 꿇어 엎드리게 해 놓았다. 그러면 무릎을 꿇은 채로 형제들은 다시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에는 늘 자기 자신을 위한 제목이 없었다고 말한다. 노점상을 하는 이웃들 중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선이였다. 마지막에 가서야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자신과 여동생이 건강하고 예수를 믿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어머니는 자기를 위해 간구 하지는 않았다, 더 급한 일이 있더라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한 무렵에는 어머니를 따라 행상을 다녀야 했다. 그가 맡은 일은 여자고등학교 앞에서 뻥튀기를 파는 것 이였다. 숨어도 보고 피해도 봤지만, 하는 수 없어 밀짚모자를 쓰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에게 들키고 만다. 무엇이 창피해서 모자를 쓰고 있느냐고 어머니가 나무라자, 그는 어머니께 따져 묻는다. 그는 어머니가 무식해서 자식이 챙피한 것도 모르고는 욕을 한다며 대꾸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나무랬다.

 

하루는 어머니가 그를 불러, 중학교를 다닐 정도로 컸으니 남의 일을 도울 줄 알아야 한다며 부잣집 잔치에 가서 일손을 거들어 주는 일을 시켰다. 당시만 해도 누가 자신에게 더러운 헌 옷이라도, 밥 한끼라도 주는 사람이 없는지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그 집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이나, 그 이후에도 물 한모금도 얻어먹지 말고 나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먼 훗날 어머니가 말한 조건 없는 봉사의 의미를 깨닫는다.

 

어머니는 서울 이태원 시장으로 올라와 자판에 생선을 파는 일을 하면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매일 매일을 주변 시장 바닥을 쓸고 닦았다고 기억한다.

그는 지금에 와서야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보여준 분은 어머니라고 고백한다. 행함으로 믿음을 고백한 어머니의 신앙이 그에겐 가슴 깊이 자리잡게 된다. 시장 상가에서는 저런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틀림없이 신용이 있을 거다란 믿음 때문에 계약서 한 장 없이 고려대를 다닐 등록금을 선금으로 마련해 준다.

 

그러나 1964년,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 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보내야 했다.

형무소를 나선 뒤에야 어머니가 단칸방에서 운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단칸방에서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자식들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자신도 그 옆에서 기도하던 어머니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가 끊이지 않던 때에도 집안에는 어머니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께서 돌아가시던 날에 어머니의 기도는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형제들은 모두 다 대학을 나와 자기의 위치에 서게 됐으며 무엇보다, 온 가족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니이다 (시39장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