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게천의 빈민시절 모습
청계천에 땀 흘린 日本人 목사
"서울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서울 시민의 희생과 헌신에 존경을 표합니다."
청계천 빈민 구제활동에 땀 흘린 노무라日本人. 목사 서울명예시민증 받는다
“청계천 빈민이 내겐 스승이었다”
[만물상] '청계천의 일본 聖者' 노무라 목사
28일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82·사진) 목사는 서울시 신청사에서 열린 서울시 명예시민 선정 기념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노무라 목사는 1970년대 청계천에서 빈민 구제활동을 펼친 공로로 이날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서울시는 1958년부터 서울시 발전에 기여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고 있다.
노무라 목사가 한국인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다. 교토에 살았던 그는 5살 때 마을 사람들이 한국인을 '조센징(일본인들이 한국 사람을 낮잡아 부르던 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고,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한국인 학생 2명이 같은 반 학생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당시엔 너무 어려 그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노무라 목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일부 미국인이 일본인들을 마치 '한국인 다루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어릴 적 한국인들이 받던 취급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1968년 처음 한국 방문길에 오른 노무라 목사는 청계천 빈민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노무라 목사는 1980년대 중반까지 50여 차례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청계천 인근 교회에서 빈민 구제와 선교 사업을 도왔다. 노무라 목사는 앞으로의 포부도 털어놓았다."지금까지 한국인에 대한 존경과 봉사를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조선일보 오유교 기자 입력 : 2013.10.29 03:02
“청계천 빈민이 내겐 스승이었다”
일본인 노무라 목사
“단 하루도 남한과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 매일 일기 예보에서 한반도 일기 상황을 전해줄 때마다 남북한을 생각하며 매일 기도한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아마도 일본의 침략에 대한 사죄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계천 빈민의 성자’로 불리는 일본인 노무라 목사가 28일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상을 받았다. 한국에 저지른 일본의 과거 만행을 갚아야 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한국의 빈민들을 위해 살아온 노무라 목사의 희생과 신앙을 그가 출간한 책을 통해 들여다봤다.
“끔찍한 빈민들의 삶,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82세, 일본 야마나시현 베다니교회)는 일제 식민지와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몸부림치던 한국 땅의 민중을 만났다.
1968년 처음 서울을 방문한 노무라 목사가 빈민 사역을 하던 김진홍 목사(현 두레교회)를 따라 간 곳은 청계천 판자촌의 한 무너져 가는 집.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좁은 방 가운데 한 소녀가 누워 있었다.
김 목사가 아이의 치마를 들추니 옆구리 밑과 무릎 부근에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파리 떼가 까맣게 소녀의 하얀 뼈를 덮고 있었다. 파리가 소녀의 다리에 알을 낳아 구더기가 생기고, 그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있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김 목사가 자신의 손으로 그 구더기를 하나 하나 잡아내기 시작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노무라 목사도 손에 침을 바르고 구더기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자꾸만 구더기가 소녀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거야 말로 생지옥이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허연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만 봤다. 죽어가는 가련한 소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난 그때 거듭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두 달 뒤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소녀의 죽음은 노무라 목사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평생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어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인생인가. 예수님은 그 소녀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힘없고 간절했던 그 소녀의 눈망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 신촌이나 서울역의 매춘부들을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 소녀는 나의 스승이었다.”
“‘지옥’이라 불리던 청계천, 내게는 ‘천국’으로 보였다”
남들은 ‘지옥’이라고 말했던 청계천 판자촌. 판자촌보다도 못해 ‘개미촌’으로 불렸던 이곳을 노무라 목사는 ‘지상의 천국’이었다고 말한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일본베다니교회)
“지옥과 같은 그곳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희망이 있고, 오순도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정이 있었다. 청계천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훌륭한 천국의 모형이었다. 큰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보고 알게 됐다. 그곳은 매춘부, 깡패들마저 위대한 천국의 시민들로 보게 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그는 50여 차례 서울을 오가며 ‘빈민운동의 대부’였던 고 제정구 의원, 화성 활빈교회 김종길 장로 등과 함께 빈민 구제 활동에 헌신했다.
해외 모금활동으로 국내 빈민 아동들의 주린 배를 채웠고, 자신의 집을 팔아 판자촌 철거 후 빈민들의 집단 이주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도 했다.
“누운 채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던 매춘부들의 눈을 통해, 깡패들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성경 교사들이었다. 나에게 최고의 신학교는 청계천이었다.”
노무라 목사는 당시 빈민 구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직접 찍은 사진과 자료를 눈빛출판사에 무료로 기증했다.최근 출간된 책 <노무라 리포트>는 빈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사진을 노무라 목사의 애정 어린 글과 함께 엮었다.
그는 책 머리글에서 일본인 크리스천으로서 한국인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표했다. 그는 지난 해 2월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피해자들에 사죄하며 참회의 플루트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70년대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은밀하게 촬영해 두었던 사진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되돌려 드릴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한국에 범한 그 무서운 침략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뉴스미션 윤화미(hwamie@naver.com)
등록일:2013-10-30 16:24:08 l 수정일:2013-10-31 17:29:23
[만물상] '청계천의 일본 聖者' 노무라 목사
1974년 마흔세 살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가 청계천하류 개미마을에 갔다.
지금 군자차량기지 부근 둑 아래 땅을 파고 얼기설기 지은 움막집들에 1600가구가 살았다.
청계천 따라 6만 명이 살던 빈민촌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간 쪽방에 열댓 살 소녀가 누워 있었다. 옆구리와 무릎에 드러난 하얀 뼈에 파리 떼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병원 갈 엄두도 못 낸 채 무당을 찾아다녔다.
▶노무라 목사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녀는 눈만 굴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노무라는 "예수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녀는 두 달 뒤 숨졌고 노무라가 찍은 사진 속에 남아 있다. 그가 1970년대 청계천의 밑바닥 삶을 담은 사진 500여장으로 지난주 사진집 '노무라 리포트'를 냈다. 그는 1984년까지 한국을 쉰 차례 넘게 드나들며 빈민을 도왔다. 그는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6·25도, 청계천 빈민도 없었다"고 믿는다.
▶노무라 목사는 도쿄 집을 팔아 청계천에 탁아소를 지었다.
남양만 간척지로 옮겨간 철거민이 키우게 하려고 뉴질랜드 종자 소 600마리를 사오기도 했다. 80년대까지 한국으로 부친 돈이 7500만엔, 8억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그는 야마나시현 산골에서 가정 교회를 꾸리고 있다. 기증받은 헌옷을 입고 사는 검소한 삶이다.
▶노무라 목사는 작년 2월 서울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았다.
무릎 꿇고 일본군위안부 동원을 사죄했다. 함께 청계천 빈민 구제를 했던 제정구의 13주기(周忌) 추모식에 온 길이었다. 그는 플루트를 꺼내 가곡 '봉선화'를 연주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가 위안부 할머니들께도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8월에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에 사죄하라고 했다. "일본에 역사의식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일본 우익들로부터 협박 전화와 이메일에 시달린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지 않을 뿐, 지난 역사에서 가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는 양심적 일본인이 더 많다"고 했다. 그가 어제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시청에서 '노무라 할아버지의 서울 사랑' 사진전도 열었다. 여든두 살 노무라 목사는 죽어 한국에 뼈 묻기를 소원한다. "한국은 내 인생의 기반이었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소명(召命)의 땅입니다." '청계천 빈민의 성자(聖者)'에게 건네는 우리의 감사(感謝)가 너무 늦었다.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입력 : 2013.10.29 03:03
*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사람은 누구나 봉사할 수 있습니다. 봉사는 선한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악해지고 죄가 범람하다보니 선악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악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디서 선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도 해외로 나가 봉사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중에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수고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보면 지치고 힘들고 성과도 별로 없어 낙심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때가 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라고하십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 알고, 일하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고 기억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이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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