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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경부고속道 40년

행복을 나눕니다 2010. 7. 14. 06:48

 

 



                             경부고속道 40년
     불가능을 가능으로, 독일 아우토반에 충격 받은 박 前대통령 저돌적 추진      40년 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9일 앞두고 '1·21' 무장간첩 청와대 뒷산 습격사건 


        박정희 "전쟁 나지 않는 한 착공하라, 험준한 지형의 난공사..77명 사망 
  윤영호 단장의 회고, 하루 3교대 일하며 공기단축, 언 땅은 짚 깔고 불질러 녹여
                  최대 난코스 대전 70㎞구간… 토사 쏟아져 가장 많은 희생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그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험난한 공사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도 발생했지만, 그의 추진력과 리더십이 당시 국내 자본과 기술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이끌었다. .
◇추진에서 준공까지 =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추진하게 된 것은 1964년 당시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면서 분단국이기도 했던 독일이 '아우토반'라는 고속도로를 기반으로 경제 부흥을 이뤘다는 점에 높은 관심을 표명했고, 시속 160km의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손수 메모하기도 했다.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선거공약을 통해서 고속도로 건설 계획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발표 직후 국가재정 등을 이유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지만, 제출된 경부고속도로 설계안들을 비교ㆍ검토하는 임시작업반이 편성되는 등 발빠르게 추진됐다.

'청와대 파견단'으로 불린 이 작업반은 이후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 업무의 기초가 되며, 고속도로 건설 역사의 시발기구로 여겨지고 있다.

1967년 11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그 산하에 편제된 건설계획조사단이 경부고속도로의 밑그림을 그렸다.

조사단은 1968년 1월 서울~대전, 4월 대구~부산, 10월 대전~대구의 428Km 구간에 이르는 노선을 확정했다. 사업비는 최종 300억 원으로 책정됐다.

정부는 이어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되는 용지매입에 착수, 일부 용지는 40년 전이라고 해도 매우 저렴한 3.3㎡당 평균 322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1968년 2월 경부고속도로 첫 구간인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 기공식이 열린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전 노선이 서울~수원(오산), 오산~대전, 대전~대구, 대구~부산 간의 4개구간으로 크게 나누어 공사가 진행됐다.

1968년 10월 공사 시작 10개월만에 서울~수원(오산)이 개통됐고, 오산~대전과 대구~부산은 이듬해 12월 완전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70년 7월 대전~대구 구간의 개통을 끝으로 2년 5개월에 걸친 경부고속도로는 완전 개통됐다.

1970년 7월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은 그 험난했던 과정 만큼이나 감동의 도가니였다. 박 대통령도 감동에 겨운 눈물을 쏟아냈다.

◇연인원 892만명 투입 = 경부고속도로는 19개 국내 민간용역업체가 조사ㆍ측량과 실시설계를 담당했고, 시공에는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단이 투입됐다.

4개구간으로 나눠 각 업체별로 할당이 됐고, 각 구간별로 공정계획을 세운 후 다시 7개 공구로 나누어 공사가 진행됐다. 현대건설이 시공의 40%를 맡았다.

터널 12곳이 시공됐고, 연인원 892만 8천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추진 당시 가장 문제가 된 것 중 하나가 재원의 규모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관기관과 건설업체 등 6개 기관에 최저 건설비를 계산해 내도록 했다.

건설부 650억원, 재무부 330억원, 서울시 180억원, 육군공병감 490억원, 현대건설 280억원으로 제출했고, 경제기획원은 산출금액을 내지 않았다.

국가의 대동맥을 뚫는 엄청난 공사에 맞춰 견적을 뽑을 만한 비교기준이 없었고, 설계나 노선에 따라 공사비 차가 컸다.

결국 현대건설이 제안한 280억원 등을 감안해 최종 300억원으로 확정됐고, 건설재원은 휘발유 세율을 100% 인상하고 도로공채를 발행해 충당하기로 했다.

건설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하면서 당초보다 40%가 늘어난 419억원이 소요됐다.

건설장비와 함께 전문 기술자, 특히 도로 관련 기술자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중장비(1천647대)는 한국전쟁 전후에 도입된 노후장비였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의 중장비업체에 사정에 사정을 거듭하며 1969년 2월 외상으로나마 필요한 장비를 겨우 갖출 수 있었다.

기술자로는 육사출신 위관급 장교가 교육을 거쳐 투입됐다. 장교의 지원 자격도 독신자로 제한됐다. 시도 때도 없이 전투와도 같은 교육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육사 출신 장교와 ROTC 출신 장교가 투입됐고, 공과대학이나 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 50명도 선발돼 짧은 교육이수 후 곧바로 현장에 배치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노선은 기존 국도가 지나던 길이 아닌 온통 논과 밭 밖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노선이었다.

조사단원들은 길이 없어서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확인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보다 상세한 조사를 위해 직접 걸어 다니면서 확인을 하며 직접 그려야만 했다.

◇77명 목숨 앗아간 공사 =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모든 구간이 어려웠지만, 특히 대전공구 약 70km구간이 최대 험준한 구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7개 공구 중에서 시공구간이 가장 길었고, 공사비도 가장 많이 들어갔다.

준공 후 경부고속도로는 1km에 평균 공사비 1억 원 정도가 소요됐지만, 대전공구는 평균 공사비 1억2천만 원이 소요됐다.

대전공구 시공 중 건설인력 모두가 두 달 동안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일을 하는가 하면, 인명피해도 잦았다.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는 대전육교 붕괴사고가 발생해 중경상자 30여 명을 비롯해 3명이 숨졌다. 직원이 임시 가설 물에서 추락해 숨졌고, 현장소장이 과로사 했다.

특히,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위치한 당재 터널은 지층이 경석이 아닌 절암 토사로 된 퇴적층으로 돼 있어 가장 어려웠던 공사로 기록된다.

터널을 뚫기 위해 발파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낙반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해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고도 공사 진척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잦은 낙반사고로 인명 피해가 속출했고, 솟구치는 용수 때문에 바위를 들어내던 인부들이 십여 미터씩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공사 진도는 하루에 많아야 2m 정도에 불과했다.

현대건설은 600여대의 중기와 헤아릴 수 없는 트럭을 동원했지만, 공사 진척이 없자, 흑자를 포기하고 작업인원을 크게 늘리기도 했다.

이렇듯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자본과 기술 인력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의 건국이래 최대 공사였던 만큼 숱한 기록을 남겼다. (연합뉴스)

* (잠4: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렘2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고속도로는 우리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끌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업적이고 잘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생케 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합니다 (이박준).
     
                                  



                      경부고속도로 비화(秘話)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서울~수원 간 공사를 시작해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대구~대전 구간을 끝으로 완공했다. 서울 양재동(당시)에서 부산 금정구 구서동 까지 428km를 잇는 대역사(大役事)였다.

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이 들었고, 연인원 892만명,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km당 약 1억원이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울과 부산의 운행시간은 15시간대에서 5시간대로 획기적으로 줄었다. 우리나라 1호 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완공한 경인고속도로(29.5km)지만,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바꾸고 경제성장의 발판 역할을 한 것은 경부고속도로였다.

◆"전쟁 나지 않는 한 공사하라"
1967년 11월 육군본부 조달감실 윤영호(85·당시 42세) 대령은 "내일부터 청와대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지원할 태스크포스인 '청와대 파견단'을 만든 것이다.

당시 1군사령부 박찬표(86·당시 43세) 중령, 육본 공병감실 방동식(80·당시 37세) 소령, 건설부 사무관 박종생(당시 50세·2007년 작고)씨 등과 함께였고, 윤씨가 단장 역할을 했다. 80년 준장으로 예편해 현재 건설업체 신영기술개발㈜을 경영하는 윤씨는 "국토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중요한 과업에 참여한 것 자체로 나는 행운아였다"고 말했다.

다음날 청와대에 출근하자 박 대통령은 윤 대령에게 "나와 함께 고속도로 한번 만들어 봅시다"고 말했다. 첫 임무는 건설비를 추정하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 지시를 받고 5개 기관에 은밀히 추정액을 제출토록 했는데 건설부(650억원), 서울시(180억원), 현대건설(289억원), 육본 공병감실(490억원) 등 제각각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이만한 공사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추정조차 중구난방이었다.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단거리 고속화도로를 하도급으로 시공해본 경험이 전부였다. 윤 대령이 종합 검토 후 360억원이 적정선이라고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육군 공병대를 투입해 비용을 더 절감하라"고 지시했다.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이한림 건설부장관 등이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경부고속도로 준공 테이프를 끊고 있다. 다음은 노선을 확정하는 일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집무실 곳곳에 지도를 펼쳐놓고 직접 자를 대고 선을 그으며 계획에 몰두했다. 윤 대령도 100만분의 1부터 1200분의 1까지 지도를 구해 품에 끼고 살았다. 먼저 서울~수원 간 32㎞의 노선을 확정하자 박 대통령은 다음날 관계 장관회의를 소집해 용지 매입을 일주일 안에 마치라고 지시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4년 박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 '아우토반'을 시찰한 것이 계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이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경제 부흥을 했다는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이 시속 160km의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달려본 뒤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67년 4월 제6대 대선 공약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제시했다.

야당과 언론, 지식인들은 국가재정 등을 이유로 시기상조라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을 불과 9일 앞둔 68년 1월 21일에는 북한의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하는 '1·21사태'까지 발생했지만 박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공사를 진행하라"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고 윤씨는 전했다.

◆험난했던 건설 과정
공사는 서울~수원, 수원~대전, 대전~대구, 대구~부산 등 4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됐고, 시공에는 현대건설 등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대가 투입됐다.

막상 공사를 시작하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장비는 물론기술자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보유한 중장비는 대부분 한국전쟁 전후에 들여온 노후장비였고 고장나기 일쑤였다.

공기 단축을 위해 하루 3교대로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겨울에는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고, 트럭 꽁무니에 버너를 매달아 반복운행을 하면서 땅을 녹인 다음 지반을 다졌다.

한번은 윤 대령이 새벽 5시 수원 구간 공사 현장에 나갔더니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 몸이 아픈데도 죽을 먹고 현장에 나와 있었다. 당시 현대건설은 전체 시공의 40%를 맡았다. 윤 대령이 "새벽같이 나오셨네요. 부지런하시네요"라고 인사하자 정 사장은 "내가 뭐가 부지런합니까. 나보다 더 일찍 나와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라고 했고, 누구냐고 묻자 "이병철(삼성 회장)이요!"라고 답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현대건설 중기사업소 과장으로 공사에 장비를 공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최대 난코스는 대전 공구 약 70km 구간이었다. 인명 피해도 잦았다. 특히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위치한 당재 터널은 지층이 퇴적층이라 가장 어려운 공사였다. 터널을 뚫기 위해 발파를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해 공사 진척이 더뎠다. 이 공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 험난한 과정만큼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박 대통령도 눈물을 쏟아내며 "이 도로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써 이뤄진 하나의 민족적인 예술작품"이라고 감격에 겨워했다.(사진, 조선일보-한국도로공사 제공))
김민철 기자 mckim@chosun.com 입력 : 2010.07.06 02:53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