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일 저런글

130 실패에서. 성공과 행복 찾은 이야기

행복을 나눕니다 2010. 2. 16. 07:41


실패에서. 성공과 행복 찾은 이야기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도 마련. 식구끼리 밥 먹는 게 행복

 

66세 권씨 설레는 설. 도자기 공장 사장했으나 망하고. 11년 만에 귀향
여관 사업하다 IMF로 망해. 자식들 고향에 맡기고 공사판 전전하며 저축

 

'금의환향' 타워크레인 기사 부부의 설 맞이
한때는 여관사업. IMF로 망해. 자식들 고향에 맡기고 공사판 전전하며 저축
"식구끼리 밥 먹는 게 행복"

"나 어때?" 이마가 훤한 하태민(48)씨가 어깨를 들썩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멋있어요." 부인 김행수(43)씨가 지그시 웃으며 남편의 검정 티셔츠와 외투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 냈다.

12일 오후 2시 인천시 부평구의 3층 짜리 다세대 주택에 사는 하씨가 "고향으로 출발" 하고 말하자, 큰딸 하늘(18)양이 과일 박스를 품에 안고 현관문을 나섰다. 둘째 하희(17)양과 막내아들 범수(13)군은 양손에 선물박스를 들고 아빠 뒤를 따랐다. 부인 김씨는 시어머니께 드릴 흰 봉투 2개를 핸드백에 넣었다. 현관문을 잠근 하씨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자주색 통장 하나를 꺼내 확인했다.

"부모님께 보여 드릴 주택청약통장입니다. '집은 언제 장만 하느냐'며 걱정하셨는데 이거 보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공사장을 전전하던 하씨는 올해 5식구가 함께 살 '내 집'을 갖게 된다. 결혼한 이래 20년 만에 처음 가져보는 '우리 집'이다. 전북 임실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하씨는 2남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빈농(貧農)의 장남이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입대했고, 제대 후 1987년 서울 광진구에 있는 여관 안내원으로 취직했다. 하씨는 "여관에서 먹고 자며 돈을 모아 초등·중학생이던 동생들에게 학비 부치고 남은 돈은 다 저축했다"고 했다.

3년 뒤인 1990년 하씨는 서울 수유동의 허름한 6층 짜리 건물을 빌려 여관 사업을 시작했다. 그 해 결혼해 자신이 운영하는 16㎡(5평)짜리 여관방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사업은 잘됐고 1996년에 하씨는 충남 아산으로 내려가 더 큰 여관을 차렸다.
부인, 두 딸(당시 2·3살)과 함께 인근에 방 한 칸 짜리 전세방을 구해 살았다.
"악착같이 돈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너무 못살았으니까."

하지만 1997년 그의 '금의환향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IMF 위기가 들이닥치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고 결국 하씨는 2001년 2억 여 원의 빚만 안은 채 여관 문을 닫았다. "사채업자들이 매일 집에 찾아와 협박했습니다.
말없이 와서 안기는 두 딸과 막내아들 때문에 그런 대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른 하씨는 자식을 고향 부모님댁에 맡기고 부인 김씨와 전국을 돌며 화장품을 팔았다. 숙식은 여관에서 해결했다. 그는 "라면 한 봉지 더 살 돈이 없어서 라면 한 개 끓여 둘이 먹다가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2년 아내와 함께 인천으로 올라온 하씨는 공사판에서 하루 10만원을 받고 타워크레인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일을 했다. 수십m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한 손으로 기둥을 잡고 다른 손으로 망치를 휘둘러 주먹만 한 볼트를 빼냈다. 그는 "힘이 없으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어 매일 밤 운동을 했다"고 했다. 타워크레인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씨는 "크레인 기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기에 무작정 도전했다"고 했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밤공부를 한 지 1년쯤 지난 2003년 12월 22일 하씨는 마침내 타워크레인 자격증을 땄다.

그는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곧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고 했다. 2004년 초부터 타워크레인 일을 하기 시작한 하씨는 월급 400여 만원으로 꼬박꼬박 빚을 갚아 나갔다. 그 해 겨울 지금 사는 인천 부평구의 방 세 칸 짜리 반 지하방(66㎡·20평)을 얻어 3남매를 데려왔다. 하씨는 "식구끼리 모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큰 행복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했다.

2007년에는 부인 김씨도 남편의 권유로 타워크레인 기사가 됐다. 하씨 부부는 차곡차곡 돈을 모았고 2008년 말 빚을 모두 청산했다. 부부는 올 9월 서울 근교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다.

부인 김씨는 "주말에도 철야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설책을 사오는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고 했다. 하씨는 "식구들 다 건강하고 오래됐지만 차도 있으니 이 정도면 금의환향"이라고 웃었다. 하씨는 가족과 함께 97년식 흰색 승용차를 몰고 고향으로 향했다.

ⓒ 조선일보 조백건 기자 loogun@chosun.com
안준용 기자 jahny@chosun.com


* (잠10:16)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전10:10)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IMF 실향민’ 11년만의 귀향하는 66세 권씨
도자기 공장 사장하다 망해, 공사판 전전하며 재기
대구의 가족에게 줄 선물 박스, 어머니 만날 생각 가슴 설레

‘권씨’는 오늘 고향으로 내려간다. 11년만이다. 그는 ‘IMF 실향민’이다.
한때 그는 대구 도자기 공장 ‘권 사장’이었다. 직원만 35명이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주문이 끊기고 재고만 쌓였다. 1998년 8월 부도가 났다. 아내와도 이혼했다.

99년 3월 그는 재기를 다짐하며 대구를 떠났다. 이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84세 노모와 세 자녀를 본 것도, 7남매의 맏이인 그가 형제들과 함께 설을 쇤 것도 너무 오래전 일이 돼 버렸다. 권씨는 “가족에게 폐가 될지 모르니 이름은 신문에 안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씨를 11일 오후 8시 서울 망우동 ‘구세군자활주거복지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사는 곳이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예순여섯 그의 표정이 어린아이 같다.

-기분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
“어무이(어머니) 만날 생각을 하니까 밤에 설레서 잠이 안 옵니더. 하늘에 붕 뜬 기분 같고…. 막 가슴이 벅차고, 눈물도 나올라 하고….”

-고향에 있을 땐 설 연휴를 어떻게 보내셨어요.
“다~ 모였지요! 온 식구들이 장남인 우리 집에서 북적북적 즐거웠지요. 우리 7남매가 자식들 다 데려오면 스무 명도 넘습니더. 술 한잔에 고스톱도 치고. 편 갈라서 윷놀이도 하고. 지는 쪽이 돈 내서 같이 외식도 하고(웃음).”

-고향 떠난 다음엔….

“설에 말입니까? 공사판 쪽방에서 혼자 소주 먹었습니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집 떠나고는 해마다 명절이면 그랬습니더.”

-왜 11년 동안이나 고향에 안 가셨나요.
“그게…. 뭐라도 좀 마련 해 가지고 떳떳하게 가고 싶어서…. 어무이도 좀 보태드리고 싶고.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한참 침묵하던 권씨가 입을 열었다. “아직 간다고 전화도 못 드렸습니더. 10년 넘게 전화 한 통 없다가 이제 와서 염치가 없어 가지고. (고개를 숙이며) 직접 가서 말씀 드려야지요. 못난 자식 용서해 달라고.”

권씨가 보여준 통장 사본.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희망을 안고 한 푼 한 푼 모은 것이다.

권씨의 어머니는 미혼인 막내딸(49)과 살고 있다. 전에는 권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난해 5월 그는 공중전화로 여동생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했다. 건강하시다 했다. 10년 만에 처음 건 전화였다. “가족들이 사람 찾는 광고까지 냈었다”며 동생은 울었다. 권씨는 끝내 어머니와 통화하지 않았다.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놀라 기절하실까 봐, 찾아 나서실까 봐.

고향을 떠난 것은 일자리가 없어서였다. 부도 낸 사업자에게 주던 공공근로 일자리조차 6개월만에 떨어졌다. 이를 악물며 서울과 경기도 등의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7년 만에 은행 빚을 다 갚았다. 권씨는 기자에게 “전 신용불량자는 아닙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2008년 말부터 건설 경기가 나빠졌다. 공사판 일자리도 사라졌다. 권씨는 2009년 1월 무작정 서울시청 복지국으로 찾아갔다.

제발 일자리 좀 달라는 그에게 시청에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구세군자활센터를 소개해줬다. 숙식이 해결됐다. 지난해 10월엔 안정된 일자리도 구했다.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희망이 생겼다.

-직장 구하고 나서 고향 갈 결심을 한 건가요.
“예. 몇 푼 안되지만 이제 여유가 있다 아입니까. 어무이한테 선물이라도 들고 갈 수 있게 됐습니더.”

-어머니 선물은 뭐 사셨어요.
“아직 못 샀습니더. 가족들 선물은 마련했는데. 어무이 선물은 여러 사람한테 물어봐도 다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연세 드신 분들은 뭐 좋아하시는지 백화점 가서 물어 볼라고요. 20만원 정도면 선물 하나 살 수 있겠습니꺼.”

20만원은 권씨의 두 달 생활비를 훌쩍 넘는 돈이다. 그는 센터와 직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출퇴근 차비를 아끼려고 왕복 1시간 넘게 걷는다. 월급은 80만원 정도지만 3개월만에 200만원 가량을 모은 비결이다. 우선 500만원 저축이 목표다.
임대주택 신청을 위해 필요한 돈이다.

“둘째 아들(32)이랑 막내딸(28)이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다
하대요. 지난해에 애들 엄마도 저 세상에 가고…. 그 소식 듣고 숨이 콱 막힙디더. 못난 남편이라 미안하고, 우리 애들 내가 돌봐야지 싶고…. 내가 돈 열심히 모아서 임대주택 받아 가지고 자식들이랑 같이 살려고요. 내 월급으로 식비도 대고 하면 애들이 결혼 자금도 모을 수 있을 겁니더.”

맏아들(34)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손자의 나이도, 이름도 권씨는 모른다.

-어떻게 자식들한테도 연락을 안 했나요.
“염치가 없어서 연락을 못했습니더.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부모가 돼서 해준 게 없는데. 딸내미가 내가 집나올 때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결국 학교 그만뒀다 합디다. (목이 메며) 가슴이 찢어지지요. 부모를 원망 안 하겠습니까. 제가 먼저 연락 못합니더.”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잖습니까.
“아입니다(아닙니다). 그것만 하고 어찌 부모라 하겠습니까. 나는 내 도리를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할 겁니더. 재회해서 한번 살아볼랍니다. (수줍게 웃으며) 우리 딸이 좀 이쁩니더. 시집 보내야지요. 그게 부모가 할 일이지요.”

-자녀들과 함께 살면 뭘 하고 싶나요.
“같이 저녁만 되면 만나고 얼굴 보는 거. 그냥 얼굴만 봐도 배가 안 고플 것 같아요. 혹시 이제는 나하고 안 산다고 할까 봐 그게 두렵습니더.”

-설에 가면 자녀분들도 와 계시지 않을까요.
“…사실은 그런 기대도 합니더. 우리 애들이 할머니 집이라고 오지나 않을까. 만약 만나게 되면…. 우리 손자, 안고 싶어요. 한 번만 안아주고 싶어요.”

권씨는 “ 식구들하고 연락은 끊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했다.

-다른 ‘IMF 실향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안 늦었습니더. 정신만 차리면 됩니더. 식구들한테도 연락하이소. 저는 이제 괜찮습니더. 숙식도 해결됐고 직장도 있고 돈만 열심히 모으면 됩니더. 임대주택도 나올 거고 자식들하고 함께 살 거란 희망이 있습니더. 저처럼 예순여섯 나이에도 하는데, 포기만 안 하면 됩니더.”

-고향 가길 주저하는 분들도 있는데.
“고향에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꼭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더. 적어도 명절만큼은 식구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십시오. 제가 10년 넘는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낀 겁니더. 꼭, 꼭 가십시오.”

그는 오늘 고향으로 간다. ‘어무이’ 보러 간다.(사진-메꽃) 
[중앙일보]
구희령 기자 [healing@joongang.co.kr]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