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주민 90%가 기독교인 백령도 주민들은 주일에는 고기잡이와 농사일을 일절 하지 않는다 조선 개항보다 50년 일찍 1832년에 영국인 기독교 선교사가 처음 선교활동 시작
‘백령도는 기독교 천국?’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주목을 받는 인천시 옹진군 백령도. 이곳은 주민의 90%가량이 기독교 신자다.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대략 25%인 점을 감안할 때 엄청난 비율이다. 인구가 4900여명에 불과한 섬이지만 교회는 무려 12개에 이른다. 이(里) 단위의 작은 마을에도 어김없이 교회는 자리 잡고 있다. 더구나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남한 최초의 교회도 이 섬에 있다.
<백령도 진촌교회> ●조선 개항 전 선교활동 시작 백령도에는 조선 개항(1882년) 훨씬 이전인 1832년에 영국인 칼 귀츨라프가 그리스도교 선교사로는 처음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조선 왕조의 그리스도교 포교 금지로 본토 입성이 어렵게 되자 황해도 장산반도에서 멀지 않은 백령도를 택한 것.
1898년 포교와 교회 설립 등의 제한이 풀리자 개화파 정치인인 허득은 이듬해인 1899년 백령도 연화리에 ‘중화동교회’를 세웠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건축자재를 공급받았다고 한다. 중화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은 당시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지휘하던 언더우드 목사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백령도에 기독교가 발전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중화동교회 바로 옆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를 보여주는 ‘백령기독교역사관’이 있다.
백령 주민들의 ‘기독교 몰입’은 지정학적 요인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북한을 코앞에 둔 최북단 접경지역에서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적극적인 구세관과 신앙체계를 갖춘 기독교가 부합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백령면사무소 최진국(33)씨는 “낙후되고 열악한 삶의 환경과 6·25전쟁 이전부터 남북 간 충돌에 시달려온 주민들이 다른 종교보다 구원관이 강한 기독교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백령도 주민들은 일요일에는 고기잡이와 농사일을 일절 하지 않는다. 백령사랑교회 김주성 목사는 “백령도 주민에게 기독교는 생활의 뿌리”라며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생활이 몸에 배어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초기 기독교 복음화 과정에서 백령도는 사울의 탄압을 피해 다윗이 몸을 숨겼던 아굴람굴과 같은 땅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의 부패로 고통받던 이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백령도 토박이인 향토사학자 김지현 씨는 “비교적 외부의 큰 간섭 없이 신앙생활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것이 높은 개신교인 비율을 유지하고 이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백령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816년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해보다 50년이나 앞섰다. 영국해군 H. J. 클리포드와 바실 홀이 업무수행차 백령도에 상륙하면서 복음이 전해졌다. 1898년에 설립된 중화동교회는 백령도 교회들의 모태가 된 곳이다. 15년째 중화동교회를 지키고 있는 전응류 목사는 “클리포드와 홀이 상륙한 지 82년 만에 중화동 교회가 설립됐다”며 “1900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예배당을 방문, 첫 세례식을 거행한 이 교회는 한국기독교사의 서막을 연 관문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매발톱)
*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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