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11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행복을 나눕니다 2009. 9. 29. 07: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정운찬 국무총리 가장 애송하는 성경 말씀은, 로마서 1장 16절 
스코필드 선교사가 등록금과 생활비 지원, 수양아들로 삼아 정신적 지주
 

경기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성경반을 만들어 활동했고, 유신시절인 1978년부터는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 지도교수로 활동했던 정운찬 총리(남포교회, 전 서울대 총장)는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고 그의 저서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밝혔다.

 

■ 정운찬 국무총리  

정 총리는 스코필드 박사님의 제안에 따라 고등학교 때부터 성경반을 만들어 활동했다.며 내가 특히 좋아한 성경 구절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밝혔다.

 

정 총리는 성경 말씀을 영어로 외우다 보니 종교 활동과 정신수양과 어학공부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거야말로 일거 삼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말씀은 특히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도 없는 미국에서 외로움이 사무칠 때, 서울대 총장이 된 뒤 반대의견에 부딪혔을 때, 무한한 용기와 격려가 되어 주었다.고 고백했다. 정 총리는 로마서 1장 16절 말씀 외에도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팔복인 5장 1절부터 12절까지도 자주 암송하는 말씀이라고 밝혔다.

 

정 총리는 내가 스코필드 박사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은, 아마 당신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성경을 외워 가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가 유일했을 것. 그분은 한 자로 틀리지 않고 암송하면 무척 대견해 하며, 내가 정말 자신의 핏줄이나 되는 양 즐거워하셨다.고 회상했다.

 

정 총리가 정신적 아버지로 섬기고 있는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 온타리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와 교수 생활을 하던 중 고종의 어의를 역임한 올리버 에이비슨 세브란스 의학교 교장으로부터 한국에 와서 세균학을 가르쳐 달라는 편지를 받고, 1916년 한국에 와서 교육과 선교활동을 했던 인물로 우리나라의 광복과 독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정 총리가 중학교 2학년 때 국회의원의 되겠다.고 하자 정치권은 본래 깨끗한 곳이 못되네. 운찬이는 그런 곳에 가지 말게.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정 총리는 스코필드 박사님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현실 정치에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다. 그래서 아마 한국의 정치현실에 좋은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 총리는 또 스코필드 박사님은 왕성한 건설적 비판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특히 국가가 어지울 대는 몸을 던져셔 그것을 구하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고 가르쳐주셨다.고 밝혔다.

 

지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려고 했다가 불출마를 선언했다.
진흙탕에 들어가 연꽃을 피우는 것이 정치라는데, 우리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애국은 무엇일까? 나라가 이처럼 어려우니 내 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제시한 물음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하지만 나의 진심은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왜곡되었고, 정치 현실은 평생 지켜온 내 나름대로의 삶의 원칙들을 깨뜨릴 것을 요구했다.며 고뇌 끝에 나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즉 경제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란 본분을 지키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1960년 4월, 중학생이 된 정 총리는 부친의 사망으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졌다.

학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그를 친구 아버지가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스코필드 선교사에게 소개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수양아들로 삼아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정 총리는 자신의 글에서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던 그의 숙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했다. (원문은 내정자 때 인터뷰 한 것, 9. 28일 국회가 총리로 인준하므로 원문에 내정자라 쓴 것을 총리로 고쳐 씀-편집자)

 

1889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스코필드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3.1운동을 비롯한 한민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선교사였다.

 

선교와 장학 사업을 통해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면서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을 돌보고 제암리 학살 사건을 해외에 알렸다.

 

사람들은 그를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해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렀고,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주었다.

일제에 의해 추방됐던 그는 58년 한국에 돌아왔다.

 

서울대 연세대 중앙대 등에서 강의하며 성경반을 인도했고, 이승만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해 탄압 받기도 했다.

70년 그가 사망하자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 총리는 "대학로를 함께 산책할 때면 늘 '약자에겐 비둘기같이 자애롭고, 강자에겐 호랑이같이 엄격 하라'고 강조했다"며 "60년대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개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경제학과에 진학했다"고 소개했다.

 

정 총리가 대학 시절 CCC에서 활동하고, 소외계층을 돌봐야 하는 정부의 책임을 강조하는 케인스학파의 이론을 공부했으며, 서울대 총장 시절 지역균형 선발 제도를 도입한 것도 스코필드 선교사가 남긴 이 같은 신앙유산 때문이었다.

 

서울 잠실동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안수집사인 정 총리는 "인생의 고비마다 스코필드 선교사를 생각하며 나를 채찍질한다"며 "더 부지런하게, 더 정직하게, 더 정의롭게 사랑하며 살라고 오늘도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그를 회상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뉴스파워 김철영 (사진-메꽃)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세금은 내 불찰
내가 의원이라도 따졌을 것
정운찬 총리 후보 단독 인터뷰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이후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다. 중앙SUNDAY 단독 보도다. 정 후보자가 23일 새벽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돌아오자 가족들이 함께 엉엉 울었다고 한다. 다음은 기사 전문. 
 
23일 새벽 인사청문회가 끝난 다음 귀가하니 오전 3시가 넘었더라. 아내와 아들딸이 TV를 통해 청문회를 꼬박 지켜보다가 집에 들어가니까 눈물을 흘리며 맞아들이더라. 아들과 딸은 아버지, 왜 세금 신고를 제대로 못 했어요? 그거 잘 몰랐어요?라고 묻더라. 그러면서 아버지가 추궁당하는 걸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라며 엉엉 울더라.

 

나는 모든 게 내 불찰이다. 내가 부덕해 너희들 가슴을 아프게 했다.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들은 울면서 우린 그래도 아버지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걸 잘 알아요. 힘내세요라며 격려하더라. 아내도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더 열심히 의지하며 살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더라.

 

나는 가족에게 우리 모두 지금부터 더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관리하며 살자며 달랬다. 아들과 딸은 아버지의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바르게 살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나의 남은 인생이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지만 청문회를 계기로 나는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했다. 내 아들딸도 도덕적으로 잘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청문회에서 나는 고생했지만 배운 게 많았다. 나와 가족에겐 청문회가 하나의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1~23일 실시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혹독한 검증을 당한 정운찬 총리 후보자는 25일 밤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자도 모임에 동참했다. 정 후보자와 가까운 4명의 지인이 모인다는 사실을 알고 현장을 찾아간 것이다. 정 후보자는 지인들을 보자마자 여러분께 미안하다.고 했다.

 

나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가 지적되는 걸보고 여러분이 실망했을지 모른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기자가 며칠 새 살이 빠진 것 같다.고 했더니실제로 그렇다. 청문회 때문에 체중이 줄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청문회를 하고 나서 내 인생의 향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고 덧붙였다. 앞으론 작은 문제도 일으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지켜봐 달라고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부족한 사람이 인터뷰는 무슨이라며 향후 2~3개월 동안 근신하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인터뷰는 그 다음에 하자며 사양했다. 기자가 질문을 던지며 끈질기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그는 몇 차례 응하다가 친척들이 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자리를 떴다.

 

기자는 26일 오전 그에게 전화를 걸어 추가로 인터뷰를 했다. 정 후보자가 청문회를 하고 나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25, 26일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하생략) 중앙일보이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