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3091. 일본 속 조선 유학생의 독립운동

행복을 나눕니다 2019. 2. 26. 00:00






일본 속 조선 유학생의 독립운동

시대의 흐름 읽고 독립의 불을 지피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 2·8독립선언과 동경YMCA

 

▲ 2·8독립선언문 ▼ 이를을 주도했던 일본 유학생들이 1920년 출옥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맨 왼쪽이 191928일 조선YMCA에서 지금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한다고 긴급 동의했던 최팔용. 서울YMCA 제공

 

대한 독립 만세!”

 

191928일 도쿄 지요다구 간다의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조선YMCA)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 폭설이 내리던 거리를 갈랐다. 400여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에서 불과 3떨어진 곳에서 독립의 열기를 분출했다. 당시 일본엔 678명의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다. 전체 유학생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무엇보다 적국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은 민족을 깨웠다.

 

한 달 뒤 조선 전역에선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1만세운동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린 손병희 선생이 2·8독립선언서를 읽고 어린 아들이 저렇게 하니 우리가 어찌 앉아 보기만 할 수 있느냐고 한 건 유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지닌 가치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2·8독립선언은 조선을 강탈한 일제에 맞선 첫 번째 만세운동이었다. 학자들은 독립선언이 도쿄에서 발표됐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서정민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6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적의 심장부이자 태풍의 눈인 도쿄, 그곳에서도 중심지에서 독립을 선포했다면서 유학생들은 일찌감치 자유 인권 자결 독립과 같은 근대 사상을 흡수했고 배운 대로 표출했다고 했다. 그는 “2·8독립선언은 1918년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단, 국내의 독립운동가들과 삼각점을 이루면서 3·1운동을 잉태했다고 밝혔다.

 

만세운동은 비밀리에 준비됐다. 하지만 28일부터는 자신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란 사실을 알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 중의원과 귀족들에게 전달할 민족대회소집청원서’ 1000부는 인쇄소를 빌려 제작했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한글과 영어, 일어로 써 600부를 등사기로 찍어냈다. 이렇게 준비한 청원서와 선언서, 결의문은 8일 오전 10시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정부의 각 대신과 귀족원, 중의원, 신문사로 발송됐다.

 

거사 시간은 오후 2, 장소는 조선YMCA였다. 젊은이들의 패기는 하늘을 찔렀다. 일경의 눈을 피하고자 학우회 결산 총회라고 광고했다. 학우회장 백남규가 개회 선언을 하자마자 최팔용이 긴급동의로 지금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한다고 외쳤다. 강당을 가득 메운 유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소리로 라고 외쳤다. 곧바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2·8독립선언서엔 일본을 향한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겼다. 일본이 요구에 불응할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 조선청년 독립단은 아() 2000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 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 장구한 역사를 유()하는 오족(吾族)은 실로 세계 최고 문명 민족의 일이라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행동을 취하여 오족의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오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할 줄을 신하노라.”

 

네 가지 결의문은 일제를 떨게 했다. 첫째, 한일병합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고 둘째,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셋째,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밝혔으며 넷째, 이들 목적이 이뤄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血戰)을 벌이겠다고 천명했다. 일경은 강제해산 명령을 내리고 실행위원 10명을 붙잡았다. 나흘 후인 12일 조선인 유학생 100여명은 인근 히비야공원에 모여 또 다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다 해산됐다.

 

김용복 한신대 석좌교수는 전 세계의 뉴스가 모여들던 도쿄는 청년들에게 독립의 꿈을 심어줬다면서 볼셰비키혁명부터 파리강화조약까지 속보를 보며 조선 독립 의지를 구체화했고 이를 선언서에 써 내려 갔다고 했다. 김 교수는 “3·1독립선언서보다 현실적이고 일본을 향한 더 강한 반감이 담겼다고 덧붙였다.

 

조선YMCA는 유학생들을 품었던 둥지였다. 유학생들은 YMCA에서 성경을 공부했고 세계를 배웠다. 민주주의를 경험했고 자유도 맛봤다. 다즈케 가즈히사 재일본 한국YMCA 2·8독립선언 기념자료 실장은 당시 유학생들이 도쿄에 오면 처음 찾는 곳이 조선YMCA였다면서 도쿄에서 조선인이 소유한 유일한 건물이었고 유학생들이 맘 편히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은 성경부터 세계정세까지 다양한 공부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면서 이런 대화의 끝엔 독립에 대한 바람이 싹텄고 결국 2·8독립선언으로 귀결됐다고 했다. 이어 조선YMCA가 없었다면 2·8독립선언이 일어나는 게 쉽질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조선에서의 3·1운동에도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뿌리는 2·8독립선언을 이끌었던 유학생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어 “2·8독립선언의 정신은 우리 현대사에서 청년 학생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나서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면서 청년 학생운동의 정점에 있는 역사적 분기점이자 청년 정신의 샘물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일보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입력 : 2019-02-07 00:0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60032&code=2311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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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 도움 주는 자도 도움받는 자도 둘 다 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국력이 약해져서 이웃 나라의 공격을 자주 받았습니다. 이를 해결해 보려고 또 다른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애급 나라에 아부하면서 동맹을 맺고 그들의 군대와 무기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급 나라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으므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 그때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애급굽의 왕은 신이 아니며 육체를 가진 사람이므로 하나님께서 가볍게 손만 들어도 그들은 망한다. 도움을 받으려는 이스라엘이나 도움을 주며 목에 힘을 주는 애급도 같이 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제쳐 두고 사람을 앞세우거나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높이고 의지하면 그가 아무리 강하고 능력이 있어 보여도 하나님은 둘 다 망하게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혹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따라가거나 사람의 방법으로 살면,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과정에 전쟁이나 가난이나 질병이나 어려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방법을 행하거나 내 마음에 좋아 보이는 인간적 요소나 방법을 따라가지 말아야, 아버지가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와 우리 개개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요? 하나님 쪽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쪽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이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