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351. 선교사 "게일" 그가 한 큰 일들

행복을 나눕니다 2013. 2. 15. 12:05

 

 

 

 

 

 

선교사 “게일” 그가 한 큰  일들

(원제-조선일보 [만물상]선교사 게일의 설날 )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은 31년간 한글 성서 번역에 헌신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에 영향, 한국 문학을 영역, 한영사전 세 번 편찬,

 

개화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 중에서도 캐나다 출신 제임스 게일(한국 이름 기일·奇一1863-1936)은 유난히 한국 문화를 사랑했다.


우리 어린아이들이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먹으면서 한 알도 흘리지 않는 것을 보고 "저건 식사가 아니라 곡예"라고 감탄한 것도 게일이었다.

그는 서울의 길거리를 지나다 젊은이들이 어른을 모시는 걸 보고 "조선은 노인 천국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조선에서 노인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게일이 한국의 설날에 대해 얘기한 게 있다.

'아이들이 설레며 기다리고, 때때옷을 입고 흥겹게 민속놀이를 하는 축제와 같은 날. 세뱃돈 같은 황홀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 날.'

게일은 우리 설날이 자기가 어렸을 때맞았던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이라고 했다.


▶당시 한국에 왔던 서양인들에게 한국은 단지 서양과는 다른 '신기함'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게일은 그런 '다름' 속에 담긴 한국 문화의 독자적 가치를 볼 줄 알았다.

그는 한국인들의 가난함과 낙후함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국 문화 속에 흐르는 인간관계의 따스함과 생활의 지혜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한국에 와서 보니 포구에 묶여있는 배는 비록 낡았지만 그걸 부리는 뱃사람의 손놀림은 서양인의 솜씨를 뛰어넘었다. 양반들은 낡은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지만 그들이 도달해 있는 정신세계는 높았다.


▶서양 선교사들 가운데 누구보다 지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게일은 김유신 장군과 세종대왕과 율곡 이이 선생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는 소설 '구운몽' 같은 한국의 고전을 영어로 번역했고 한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로 '한영사전'을 세 번이나 편찬했다.


서울 YMCA를 세우고 이승만의 미국 유학을 주선해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탠 것도 그였다.


게일이 담임했던 서울 연동교회가그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17일 기념 예배와 함께 게일학술연구원을 개관하고 기념 논문집도 낼 계획이다.


▶게일은 선교사로서 기독교의 믿음과 가치를 뿌리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러나 그는 이 때문에 '한국의 크리스마스'인 설날 같은 명절이 빛을 잃게 될까 걱정했다.


"현대 문명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움직임 앞에서 이러한 축제의 날들은 해가 갈수록 퇴락해 갈 것이다."


게일은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고대 그리스)이라고 말하고 싶다"고도 했다.

게일의 발자취를 다시 돌아보면서 전통의 보존과 세계화 문제를 생각해본다.

조선일보 만물상[원제:선교사 게일의 설날-김태익 논설위원] 입력 : 2013.02.08 22:26


* (고전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 지금은 한국이 세계10위권에 들만큼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지만,

선교사가 처음 한국으로 왔을 그 시기엔 우리나라가 오늘날 아프리카의 어느 최빈국보다 더 가난한 처지였음이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인데도 한국과 국민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며 헌신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소명으로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가 2만 3천여 명에 달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이박준


(이하는 게일선교사의 추가자료-관리자)


31년간 한글 성서 번역에 헌신한 "게일" 선교사

이승만 이상재 함석헌등 지도자에 영향, 고전 영역, 독립협회 간부 위한 감옥학교 열어

 

 

게일(Gale·한국 이름 奇一·1863~1936사진)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이었던 선교사다. 『구운몽』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소개했고 한국 최초로 『한영자전』을 출판했으며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했다.


그는 한국인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았으며 한국인의 얼을 지닌 참으로 기이한 선교사였다. 본명보다 한국 이름 기일로 불리기를 원했다.


게일은 1893년부터 언더우드·아펜젤러·스크랜턴 박사와 함께 성서 번역위원으로 31년간 봉사했다. 그동안 그는 히브리어 원전 신약성경의 대부분과 구약성경의 상당량을 번역했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한글판 성경이 급속도로 대중화되는 데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게일은 1911년 『성경전서』 출판기념사에서 하나님 칭호 문제의 중요성을 되짚고 있다. 한글판 성경은 한글을 명실상부한 국민문자로 일반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것은 신앙을 떠나 문맹 퇴치와 개화의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공적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글은 중인과 사대부가의 아녀자들이 쓰는 문자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게일은 1905년 서울 종로 연동교회에 부임해 27년간 목회했다.

그가 추대한 초대 장로 고찬익은 갖바치 천민 출신이었다. 광대 출신 임공진을 장로로 세우고 양산도 가락에 마태복음 내용을 가사로 붙여 부른 찬송가 이야기는 게일의 ‘열린 사고’를 예증한다.


독립협회 간부들이 감옥에 들어가자, 게일은 옥중학교와 도서실을 운영해 그들을 감화시킨다. 월남 이상재를 비롯한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연동교회 성도가 되었고 이승만은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승만은 게일이 써준 소개장을 갖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제중원 의사 알렌이 ‘한국인을 미국에 유학 보내지 말라’는 선교지침에 따라 소개장을 거절한 뒤였다. 그러나 게일은 지침을 무시하고 인재 양성에 뜻을 뒀다.

함석헌의 스승이자 진리의 사람이라고 추앙받는 다석 유영모 선생도 아버지 유명근과 함께 연동교회에 다니며 게일의 영향을 받았다.


1892년 게일은 해리엇 여사와 결혼한다.

게일이 부산 선교를 하던 시절 그를 찾아와 서울로 불러 올렸던 제중원 의사 헤론의 미망인이 바로 해리엇 여사다. 당시 헤론의 집에 기숙했던 29세 청년 게일은 세 살이나 위인 미망인과 두 자매를 식구로 맞아들였다. 해리엇은 1908년 결핵으로 사망한다.


게일은 사랑했던 아내 해리엇을 첫 남편 헤론 옆에 안장해주는 끈끈한 우정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재혼한 아내 에이더 세일이 낳은 아들 비비언이 영아 때 죽자, 헤론과 해리엇 묘역에 묻는다. 게일의 따뜻한 심성과 가족관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다.


게일은 고려시대의 위대한 문인 이규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강화도에 있는 무덤을 찾아갈 정도였다.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와 서구 기독교 문명의 조화와 통섭을 꾀했던 그는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서양에 번역해준 개화기 최고의 문인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유영식(65) 교수는 올해 『게일평전』을 출간할 계획이다.

중앙일보 김종록 객원기자<joins.com>,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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