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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올해의 선한 목자상

행복을 나눕니다 2011. 1. 16. 13:04

 

 

     올해의 선한 목자상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매곡리에 위치한 매곡교회. 
현 담임인 정도성 목사가 부임한 후 8명이던 교인이 180여명으로 불어났다. 
주민들과 하나된 ‘된장 목회’로 시골 교회 부흥 일궈

 

올해 한국교회정보센타가 선정한 ‘선한목자상’에는 매곡교회 정도성 목사가 수상했다. 매곡교회는 1964년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매곡리에 설립된 작은 시골 교회다. 당시 모두가 가난했기에 굶기를 밥먹듯했던 시절, 이 교회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줄 수 없어 오랫동안 담임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현 담임인 정도성 목사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전도사로 이 교회에 부임했다. 부임 당시 8명이었던 교인이 지금은 180여명으로 불었다. 농촌 교회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정 목사는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였다. 네 살 때 지금은 고인이 된 고흥 길두교회의 박석순 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기적같이 걸을 수 있게 됐다. 그 때 정 목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아들이 목회자가 되길 바라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잘 살아 보자는 마음을 먹고 정든 고향을 떠났지만, 그를 반겨 주는 곳은 없었다. 그 때 그를 받아준 곳이 폭력조직이었다. 그렇게 5년 정도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러나 조직은 자신이 영원히 머물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어렵게 조폭 생활을 청산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

* ‘2010년의 선한 목자상’ 전남 매곡교회 정도성 목사

조직에서 도망 나온 그는 도피 생활을 하던 산에서 사고를 당해 다시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다.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는 “하나님, 나 좀 살려 주소. 살려 주면 당신 위해서 살랍니다.” 하고 외쳤다. 하나님은 그를 기적적으로 살리셨고, 그는 조폭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스물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호남신학교에 들어갔다. 면접을 할 때 총장과 교수들에게 “공부할 기회만 주시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목회자가 되겠다”며 간청했다. 그의 간절한 뜻이 통해 결국 입학할 수 있었고, 전도사의 신분으로 매곡교회에 부임했다.

부임 당시 교인은 7명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교역자들의 생활을 책임져 줄 수 없었다. 부임 첫 달 정 목사가 받은 사례비는 1만원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수도 없이 굶어야 했다. 하지만 정 목사는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가난한 생활과 조직 사회에서 체험한 고난을 이기는 힘으로 어떤 어려움도 감당해나갈 수 있었다. 목회는 힘들었지만 의미는 깊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록 수는 적었지만 교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진심으로 교인들을 가족같이 생각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교인들은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 때 정 목사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번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라게 된다. 교회 자체적으로 생존 전략을 마련하자. 우리 형편에 맞는 자립교회가 되는 방법을 만들어 보자.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고 교인들을 격려했다.
정 목사 내외는 교회 주변에 놓은 1,000여 개의 장독을 푸른 초장 위의 또 하나의 양떼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 자립교회가 되기 위한 몸부림

정 목사는 자립교회가 되는 길은 교인들이 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운기를 타고 북을 치면서 어린이들을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교회에 온 아이들과 함께 운동, 태권도, 에어로빅, 방과 후 공부 지도 등을 시작했다.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달라지는 것을 본 부모들도 교회와 정 목사에 호감을 보였다. 이 호감이 어린이 부모들을 위한 ‘농민교육’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교인 수도 늘게 됐다.

정 목사가 받는 사례비도 1만원에서 24만원으로 올랐다. 정 목사 내외는 24만원의 사례비 중에서 매달 7만2천원씩 5년간 적금을 넣기 시작했다. 사례비로 한 달 죽을 먹기도 힘든 판국에 무슨 적금이냐고 호소하는 사모의 핀잔을 들을 때 정 목사는 “노루가 지나가는 길목에다 웅덩이를 파 놓아야 노루를 잡듯이, 내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시지 않겠느냐”며 “우리 교회가 바라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 부부가 이렇게 배고픔을 이겨가면서 모은 이 작은 눈물로부터 시작될 것을 믿는다”고 위로했다.

농촌에서 태어나 지독한 가난을 겪은 정 목사는 농촌의 가난을 해결하지 않고는 교회 부흥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잘 사는 농촌을 만들 방법을 달라고 새벽마다 기도했다. 틈틈이 농업에 관한 책도 읽었다. 교인 전체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교인들 가정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처음 시작한 일은 교인들이 생산한 쌀을 도시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직거래 방법으로 파는 일을 해보았지만, 어느 정도의 수익만 있을 뿐 한계에 직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할 때 정 목사의 머리에 ‘콩’이 떠올랐다. 매곡교회 인근은 콩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여기서 재배된 콩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그는 곧바로 “콩으로 시작하자”라는 다짐을 했다.

* 교회를 살리고 지역을 살린 매곡교회 전통 식품

정 목사는 어린시절 어머니가 메주를 만드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콩으로 메주와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파는 것이 이 고장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당시 인근 농민들이 힘들게 좋은 콩을 재배했지만, 정부에서 전량 수매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팔아야 했다. 도시에서 온 상인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가격을 후려쳐, 농민들만 손해를 보고 콩을 파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그래서 정 목사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이 지역의 콩으로 된장, 간장, 메주를 만들어 판매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콩을 못 팔아서 애태우는 농민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콩을 사줄 수 있고, 농민들은 안심하고 콩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정 목사는 5년간 적금을 들어 모은 5백만원과 빚을 낸 돈으로 교회 옆에 500평의 땅을 샀다. 교인들도 형편에 따라 투자를 해서 건물을 짓고 매곡교회 부성 영농조합법인을 탄생시켰고, ‘전통에덴식품’이라는 상호로 등록을 마쳤다.

우선 전통 된장과 간장을 만들기 위해 콩을 구입했다.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보관한 항아리도 구입했다. 인근 농민들이 수확한 콩은 농협에서 수매하는 가격보다 2만원 정도 더 줬다. 정부 수매가격보다 더 주었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은 교회의 영농조합에 호감과 고마움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든 메주와 된장을 만들어 시골에서 열리는 5일장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판매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홍보를 하고 판매를 부탁했다.

교회에서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거절을 당하는 일도 많았지만 정 목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전통 된장, 한국 최고의 된장과 간장을 만들기만 하면 언젠가는 잘 팔릴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기도했다. 최고의 된장을 만들기 위해 방부제는 물론 조미료와 색소, 밀가루나 옥수수를 전혀 넣지 않았으며, 고흥에서 그 해에 생산된 햇콩만을 원료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메주를 만드는 과정부터 된장 간장을 만드는 방법도 전통대로 했다.

정 목사 내외의 일과는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부터 시작해 밤 12시가 넘어야 끝나는 날도 많았다. 메주를 띄우는 것 하며 소금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어려웠고,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노동이었다. 수입산과 섞인 소금을 잘못 가져와 많은 된장을 버리기도 했다. 또 띄우는 방의 온도와 기간, 인력 동원 등 모든 일을 스스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된장은 살아있는 식품이기 때문에 하나에서 열까지 공정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독 안에 든 된장을 전부 버려야 했다. 이런 노력으로 매곡교회의 된장은 구수하고 담백한, 고유의 ‘어머니 손맛’이 깃들어 ‘좋은 전통 된장’이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31년간 오직 전통 된장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려 ‘전통 된장 박사’가 된 정 목사 내외는 교회 주변에 놓은 1,000여개의 장독을 푸른 초장 위의 또 하나의 양떼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교회가 된 매곡교회

정 목사는 지역 주민들의 어렵고 힘든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가면서 협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소통의 공간으로 복지관을 건립했다. 복지관은 장례식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대충 만든 장례식장이 아니다. 냉동 시신 보관함까지 완벽하게 갖춘 정식 장례식장으로 사용료는 무료다. 교회가 제시한 조건은 단 하나, 이곳에서 장례를 치를 경우 자녀들이 조의금에 손댈 수 없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장례를 치르고 남은 조의금은 살아 계신 부모에게 100%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남편이나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남은 이를 생각해서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마을에 혐오시설이 만들어진다고 반대했었지만, 지금은 매곡교회의 장례 운영 방식에 대만족하고 있다. 일반 장례예식장 가격의 1/3 수준으로, 음식은 교인들이 장만하며 교회는 음식 재료값만 받는다.

교회와 마을의 장벽은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하루아침에 된 일은 아니다. 오랜 시간 하나 둘 신뢰가 쌓인 덕분이다. 마을 주민들은 교회가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해 초청하면 대부분 참석하낟. 매곡교회 교인이건 아니건 상관 없이 마을 사람들은 매곡교회를 ‘우리 교회’라고 부르낟. 이제 마을 주민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십일조의 개념은 안다. 수 년에 걸쳐 매곡교회와 정 목사의 진심을 알게 된 주민은 자발적으로 소득의 십일조를 교회에 내기도 한다. 가령 교회가 콩을 100만원어치 수매하면 콩을 판 주민은 슬그머니 10만원을 교회에 바치는 식이다.

매곡교회는 매주 두 차례 동강면 내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들에게 교회에서 정성껏 만든 도시락을 배달한다. 도시에 살던 자녀 부부가 이혼한 후 시골 할머니 댁으로 내려온 아이들의 급식비도 책임진다. 1년에 두 번씩 동강면의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가까운 여행길은 교회에서 차량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정 목사는 “제가 바로 걸어다니는 매곡교회”라고 말한다. 시골 교회 교인들은 목사를 평가할 때 설교보다는 삶을 본다고 한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농촌 목회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주일에는 목사지만 강단에서 내려오는 순간 농사꾼이자 지역 주민으로, 그들과 함께 숨쉬는 목자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