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3757. 세계적 영적 지도자 조용기 목사

행복을 나눕니다 2021. 9. 20. 07:15

 

 

세계적 영적 지도자  조용기 목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태복음 25장 21절)

 

 

[이야기 순서]

1. 한국교회의 큰 별 지다…조용기 목사 소천

2. “오직 성령” 온누리에 복음 선포… 초대교회 같은 부흥 이끌어

3. 김장환 조용기 라이벌로 만나 60년 지기 절친으로

4. “매일 10시간씩 목 터져라 기도”… 천막교회에 성령의 바람 불어

 

 

1. 한국교회의 큰 별 지다조용기 목사 소천

 

↑ 20세기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추앙받는 조용기(사진)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14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향년 86세.

 

조 목사는 뇌출혈성으로 이날 7시 13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조 목사는 1958년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최자실 전도사(1915~1989)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세우며 목회를 시작했다.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으로 단일교회 역사상 성도 수 78만명이라는 폭발적인 부흥을 이뤘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2008년 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2008년 원로목사로 추대된 이후 지금까지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고인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손꼽힌다. 한국과 세계교회에 강력한 성령 운동과 철야 예배, 구역조직(셀 모임)의 핵심원리를 전수했다. 조 목사는 세계 최대의 교회라는 타이틀에 그치지 않고 굿피플, 사랑과행복나눔재단, 심장병어린이돕기운동,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설립, 사회복지법인 엘림복지회 운영, 평양조용기전문심장병원 건립 운동 등 각 분야로 전인 구원의 사역을 왕성하게 전개했다.

 

한세대, 순복음영산신학원, 미국 베데스다대, 국민일보, 신앙계, FGTV, 굿티비 기독교복음방송 등을 설립하며 신학교육과 문서·방송 선교에도 힘썼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국제교회성장연구원 등을 통해 교회부흥의 원리를 전 세계에 나누며 성령 운동을 주도했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됐다. 장례예식은 18일 한국교회장으로 진행된다. 하관예배는 같은 날 오전 10시 경기도 파주시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에서 열린다. 유족으로는 장남 희준, 차남 민제 국민일보 회장, 삼남 승제 한세대 이사 등이 있다. 부인 고 김성혜 여사와는 지난 2월 11일 사별했다.

 

국민일보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입력 : 2021-09-14 08:28/수정 : 2021-09-14 09:47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267886&code=61221111&sid1=chr

 

 

  

2. “오직 성령 온누리에 복음 선포

초대교회 같은 부흥 이끌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목회 <> 사회구원과 세계성령운동

 

조용기 목사가 이끈 집회는 자주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사진은 199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 세계기도대회’를 촬영한 것으로 당시 여의도광장에는 100만명 넘는 성도가 모였다.

 

엄청난 인파였다.

1993년 3월 25~3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아프리카 성령화 대성회’ 참가자는 무려 120만명에 달했다. 성회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연단에 오른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되새겼다.

 

이듬해 2월 10~12일 인도 유명 휴양지인 마리나 해변에서 열린 성회도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조용기 목사 초청 국제 CGI 인도 대성회’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 행사 참가자는 200만명을 웃돌았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이런 행사가 열렸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같은 해 3월 9~11일에는 남미에서 비슷한 이름을 내건 성회가 잇달아 열렸다. 칠레 성회에는 8만명, 파라과이 성회에는 13만명이 운집했다.

 

조 목사의 삶을 정리할 때 이들 성회가 열린 93~94년은 그의 선교 사역이 터닝 포인트를 맞은 시기로 평가된다. 조 목사는 이때를 기점으로 제3세계 원주민 선교에도 집중했다. 순복음세계선교학교를 통해 선교사 훈련을 시작했고 해외 신학교도 여럿 설립했다.

 

비슷한 시기 조 목사가 한국교회의 선교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국내에서 연 행사들도 큰 주목을 받았다. 94년 10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한 ‘10·3 세계기도대회’가 대표적이다. 조 목사는 바닥까지 떨어진 도덕성 문제를 지적했고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거론했으며 기아 문제 해결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당시 광장에 모인 성도는 100만명에 달했다.

성회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동시통역 됐고 위성을 통해 미국에도 방송됐다.

 

세계성령운동의 불길은 2000년대에도 꺼지지 않았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중동과 러시아, 중국에 복음을 퍼뜨렸다. 조 목사는 2000년 성령운동을 지원하는 선교전문기구 ‘데이비드 조 에반젤리스틱 미션(DCEM)’을 설립했다. 2004년에는 ‘한국 기독교 성령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해 성령운동에 이바지한 각계 인물 100명 등을 발표했다.

 

이렇듯 21세기에도 조 목사의 열정적인 활동은 계속됐다. 그를 향한 세계적인 관심 역시 뜨거웠다. 2000년대 조 목사의 발자취를 되짚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북한 선교다. 특히 평양에서 착공식까지 가진 ‘조용기 심장전문병원’은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조 목사는 병원 착공 예배에서 “제도와 체제가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타깝게도 2010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병원 공사가 중단됐고 현재는 완공 시기를 가늠하기 힘든 상태다.

 

2008년 조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한국사회와 세계 교회는 조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2018년 5월 19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한반도 평화와 희망나눔을 위한 기도대성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칼이나 창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승리했습니다. 세상은 핵무기와 군사력을 강조하지만 성경은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땅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주님의 군사로 택하시고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국민일보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입력 : 2021-09-17 17:32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09703&code=23111111&sid1=chr

 

 

3. 김장환 조용기, 라이벌로만나 60년 지기 절친으로

“1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목사

조용기 목사 장례예배 설교 맡은 김장환 목사

 

조용기 목사의 장례예배가 18일 한국교회장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열린다. 장례예배 설교는 조 목사의 60년 지기 친구인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맡았다. 1934년생인 김 목사는 조 목사보다 두 살 많지만, 두 사람은 신앙의 동역자로 라이벌이자 좋은 친구였다.

 

김 목사는 2000년 발간한 책 ‘김장환 목사의 이야기,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에서 1962년 서울 서대문구 순복음중앙교회 집회에서 조 목사와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조 목사는 “김 목사가 집회에 올 때 외국인 아내를 데리고 온 것이 부럽기도 하고 유학까지 하고 온 김 목사에게 시기가 났다”고 말했다.

 

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집회 통역을 앞두고 두 사람은 라이벌로 만났다. 조 목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대회 때 설교 통역 부탁을 받고 통역 연습을 했다. 하지만 통역 자리가 김장환 목사에게 돌아가자 라이벌 의식이 생겼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집회를 마친 뒤 조 목사는 ‘이렇게 멋진 목사님과 친구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먼저 김 목사에게 “친구가 되자”고 제의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됐다.

 

마치 성경 속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우정이었다. 조 목사와 김 목사의 우정은 한국교계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두 사람의 각별한 우정을 시기해 떼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 목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김 목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연결하라”고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뒀다. 어느 날 비서가 금요철야예배 중간에 대성전 강단 위에 설치된 전화기로 김 목사의 전화를 연결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두 사람은 해외에 나가면 “데이비드 조(조용기)를 아십니까” “빌리 킴(김장환)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조 목사는 김 목사에 대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휼륭한 목사”라고 말했고, 김 목사는 조 목사에 대해 “1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목사”라고 답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입력 : 2021-09-16 03:0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09762

 

 

 

4. “매일 10시간씩 목 터져라 기도

천막교회에 성령의 바람 불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목회 <> 성령의 사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류동희 박사) ‘다윗보다 큰 사람’(연규홍 전 한신대 총장)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김호환 목사) 등 조용기 목사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3회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일구며 세계 성령운동을 이끈 조 목사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부귀영화는 금방 잿더미가 되고 만단다. 복음을 전하는 데 너의 일생을 바쳐라.” “지는 폐병 환자입니더.” “내가 네 폐병을 고쳐줄 테니 평생 나의 종이 되겠느냐.” “예, 지를 고쳐 주시마 평생 종이 되겠심니더.”(국제신학연구원 편, ‘여의도의 목회자’)

 

6·25전쟁 당시 각혈을 하던 17세 소년 조용기에게 다가온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자였다. 이후 청년 조용기는 켄 타이스 선교사의 천막부흥회 통역으로 강력한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1956년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58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공동묘지 옆 깨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다. 5명으로 시작한 이곳이 훗날 세계 최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된다.

 

그는 맨바닥에 무릎 꿇고 5시간 이상 병자를 고쳐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다 7년간 중풍병으로 삶을 포기했던 무성이 엄마가 성령의 능력으로 고침 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우선 따뜻한 밥 한 공기, 약 한 봉지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겐 복음이었습니다. 실제로 현실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전혀 줄 수 없는 복음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야말로 삼박자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병자가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조동 천막 교회에 귀신 들린 여인, 중풍에 걸린 의사 부인, 관절염 폐병 중풍 위장병 환자 등이 몰려들었다.

 

“나는 매일 10시간 가까이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4시30분이면 일어나 아침 7시까지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은 후 12시까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또 저녁까지 기도만 했습니다.”

 

62년 2월 서울 서대문구 순복음중앙부흥회관 헌당 예배를 드렸다.

이후 성도가 1200명으로 늘어났다. 예배를 드릴 수 없어 주차장 마당에 비닐을 깔고 스피커를 설치할 정도였다.

 

성도가 계속 불어나자 64년 3층, 4층을 증축했다. 67년 다시 5층을 증축했다. 그는 강단에 올라설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다. “성령님, 지금부터는 성령님께서 설교하실 시간입니다. 성령님께서 앞장서 주시면 저는 그저 성령님을 뒤따라가겠습니다.”

 

조 목사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64년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창립 50주년 기념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 상황을 알렸다. 28세 때의 일이다.

 

그는 66년 30세의 나이에 기하성 총회장에 선출됐다. 67년 세계오순절 총회 아시아 대표로 영국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해 6월부턴 유럽 부흥성회를 인도했다.

 

조 목사는 68년 3부로 나눠 예배를 드려도 좌석이 없자 교회 이전을 준비한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만나 융자로 여의도에 5000평을 확보한다. 그리고 교회재정이 100만원밖에 없었지만 20억원이나 되는 공사를 믿음으로 시작한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건축자재 가격이 폭등했다.

헌금이 줄고 대출이 막히자 조 목사는 녹슨 철골을 붙들고 “주님, 차라리 이 교회가 내 머리 위에 무너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쌀가마니를 깔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처음에는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면 별 어려움 없이 건축비 문제가 해결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저를 쳐서 눈물로 회개하게 했습니다.”

 

눈물겨운 성도들의 헌신으로 73년 9월 1만명이 예배를 드리는 동양 최대의 교회당을 헌당한다. 개척 15년 만의 일이었다.

 

국민일보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입력 : 2021-09-16 03:0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09755&code=23111111&sid1=chr

 

 

 

◆ ↓ 조용기 목사 추모 영상

https://youtu.be/L4vJK2JPVj0

 

 

◆ ↓ 조용기 목사 더 많은 자료 보기

http://www.sermon66.com/news_view.html?s=index&no=265676&hd=1&s_id=&ss_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