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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3. 한국 6.25 전쟁에 나타난 기적들

행복을 나눕니다 2021. 6. 22. 00:00

 

 

한국 6.25 전쟁에 나타난 기적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북한 김일성 군대 12만 명과 소련이 제공한 탱크 246대를 앞세워 선전포고 없이 남쪽 대한민국을 침공하므로 시작된 6.25 전쟁은 군사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중에 우리가 체험한 기적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합니다.

 

 

(1) UN군의 신속한 참전이 기적.

 

첫 번째가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이었습니다.

미군을 위시한 UN군의 신속한 참전으로 이 나라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이 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유엔 기구들 중에는 안전보장위원회가 있고 안전보장위원회에는 5 나라 상임 이사국들이 있습니다. 상임 이사국의 결정은 전원 합의제여서 5 나라들 중에서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결정할 수 없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자 상임 이사국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면 소련이 당연히 반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상임 이사국 회의에 소련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참석치 않았기에 다른 4 나라 대표들이 유엔 참전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일이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날 회의에 소련 대표가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더라면 유엔군은 참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그 회의에 소련 대표 말리크가 왜 불참하였을까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신앙적으로 판단하자면 하나님께서 소련 대표의 참석을 막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엔군이 신속히 참전케 되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한국군의 지휘를 유엔군의 지휘 아래 두어 전투 지휘권이 일원화 되었기에 이 나라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에서 겪은 5가지 기적들 중에서 첫째입니다.(20021-06-11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2) 남침 중인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것이 기적.

 

71년 전에 일어나 단군 이래 최악의 비극을 겪게 하였던 6.25 전쟁은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5가지 결정적인 기적을 겪으며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어제 글에서 첫 번째 기적으로 신속한 유엔군 참전을 들었습니다. 오늘 적는 두 번째 기적에서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3일간 서울에서 머물며 국군에게 3일간이란 황금의 시간을 주어 전선을 정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원래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타린 앞에서 남침을 허락하여 주기만 하면 남조선 전체를 일주일 안에 점령하여 승리로 마무리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스타린은 그 말을 믿고 240대가 넘는 소련제 탱크를 위시한 무기를 제공하고 전략 계획까지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곧바로 남진하여 부산까지 진격하지를 아니하고 서울에서 3일간을 허비하였습니다. 그때 인민군이 왜 3일을 서울에서 허비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어 3일간 서울에 머물게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그 3일로 인하여 국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유엔군이 파병 결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첫 선발대가 파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2021-06-12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3) 공산화가 될 뻔한 남한에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세워진 기적.

 

6.25 전쟁은 단군 이래 최악의 비극이었습니다.

임진왜란 7년의 환란이 끔찍하긴 하였지만 이민족의 침략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은 동족간의 전쟁이었기에 그 상처와 고통은 더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군사적인 면에서 6.25 전쟁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보호하시어 공산화를 막으시고 자유 한국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3번째 기적은 대한민국의 탄생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 통치가 끝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3년간의 미군정 기간 동안에 실시한 여론조사가 있습니다.

 

여론조사 질문이 앞으로 세워질 신생 독립 국가 대한민국이 공산주의를 택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국민 78%가 공산주의 국가를 택하였습니다. 거기에다 박헌영이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력과 선동력을 갖춘 천재적인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무려 일백만에 가까운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 힘을 믿고 박헌영은 인민공화국 설립을 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그런 조직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민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안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박헌영 진영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였습니다.

백만에 이르는 당을 관리 운영하기에 자금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위조지폐를 찍었습니다.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선택한 악수였습니다. 첫째는 공산당의 운영 자금을 확보하고 둘째는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공산주의에 유리한 정국으로 조성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위조지폐를 너무 많이 찍었습니다.

군정 하의 경찰이 조사에 착수하여 뚝섬 지역에 있는 조선정판사란 인쇄소를 급습하여 지폐를 찍고 있는 12명의 일꾼들을 검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들 모두가 공산당의 열성 당원임이 드러나고 그 배후에 박헌영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민들이 공산당의 실체를 알게 되고 민심이 공산당 지지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견디다 못한 그는 관 속에 시체로 위장하여 서울을 벗어나 북한으로 도피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뻔한 박헌영이 몰락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철저한 반공정신에 자유 민주주의의 주창자인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격렬하였던 좌우 대립에서 자유 민주 세력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된 과정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있었습니다.

 

건국 후 UN 총회에서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1948.12월 파리 UN총회에서 한국의 건국 승인 안건이 올라가기만 하면 소련을 비롯한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공산 국가 대표가 의사 진행 발언을 독차지하여 안건 처리를 못하게 막았습니다.

 

한국 UN대표단장인 장면 박사가 마지막 12일을 대비하여 파리현지에서 마지막 방법으로 철야기도를 선포하고 파리 시내 교회로 갔고, 서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교회에 기도를 부탁한 상태였는데, 12월 12일 마지막 날도 소련 대표가 두 시간 연설을 하려고 연단에 나갔고 뒤를 이어 연설할 헝가리 체코 폴란드 대표는 쉬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때 연설하든 소련 대표가 갑자기 목에 결절이 발병하여 숨을 헐떡이며 말을 못하게 되어 병원으로 긴급후송하게 됩니다. 이틈을 이용하여 사회자가 대한민국 건국 안을 상정하여 찬성 48. 반대6. 기권 1(스위스)로 대한민국 건국 승안이 가결 되므로 UN 회원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전적 하나님께서 일하신 기적입니다.

 

만약 이날 승인 되지 않았다면 1950년 6.25 전쟁 때 UN군이 한국에 파병할 법적 근거가 없어 파병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2021-06-14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내용 후반부 김목사 육성 추가함-관리자)

 

(4) 인천 상륙 작전 성공이 기적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선 전 전선에서 인민군 12만이 공격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절 국군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연 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미군은 전해인 1949년 6월에 모두 철수한 후였습니다.

 

인민군은 소련이 제공한 탱크 244 대를 앞세우고 침공한지라 국군으로서는 마냥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이 참전케 되었습니다. 유엔군의 총지휘자는 맥아더 장군입니다.

 

전략의 천재였던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처음 구상한 것은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이었습니다.

 

맥아더는 멀리서 서울을 바라보며 9월 15일을 상륙 예정일로 하는 크로마이트 작전인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구상은 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인천항의 조건이 여러 가지로 상륙에 부적합하다는 반대였습니다.

첫째는 좁고 구불구불한 수로 때문입니다.

둘째는 한정된 진입로 때문입니다.

셋째는 인천의 조석의 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점입니다.

넷째는 인천은 큰 함정이 상륙하기에 적합한 해안이 없는 점이었습니다.

다섯째는 요새화되어 있는 월미도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은 이런 조건들을 고려하여 군산이나 아산만 상륙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소신을 굽히지 아니하고 장장 45분에 걸쳐 연설하여 소신을 관철하였습니다.

 

〈나는 우리의 정의와 자유가 아직도 확고함을 믿습니다.

북한군은 병참선이 너무 길어 서울에서 신속히 차단할 수 있습니다.

북한군의 모든 전투 부대가 낙동강에 투입되어 있어 상륙 작전 방어에 전력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적하는 인천의 지리적 곤란함 탓에 김일성도 상륙 불가능 지역으로 생각하고 방어가 허술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역이용하여 기습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해야 합니다. 나는 적을 분쇄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장병 10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이 계획을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률이 오천 분의 일이라 합니다.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상륙 작전에 성공한 사실이 기적이라 하겠습니다.

 

낙동강 전선 돌파에 올인하고 있던 인민군은, 인천이 탈환되므로 군수품 보급과 후방지원이 되지 않으므로 낙동강 전선이 지리멸렬하게 무너졌습니다.

 

불리하기만 하던 전세를 단번에 전환시켜 승기를 잡았습니다. 6.25 전쟁에서 겪은 기적들 중의 하나입니다.(2021-06-15.19. 양일 글 합체편집-관리자)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5) 남로당 서울시당 홍민표 위원장의 전향과 자수가 기적.

 

거듭 말하여 6.25 전쟁은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소련제 전차 244대를 앞세우고 중무장한 12만 대군이 밀어 닥치는데 무방비 상태였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 겨레를 어여삐 여기시어 베풀어 주신 은혜였음을 고백케 됩니다.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1949년과 50년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타린을 만나 남한을 무력 침공하는 허락을 받으려는 만남에서 말하였다 합니다.

 

〈남한을 공격하여 부산까지 진격함에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서울을 점령하고 나면 20만 남로당 당원들이 폭동을 일으켜 혁명을 성공시킬 것입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남로당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홍민표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북으로 도피한 박헌영의 뒤를 이어 남로당 총책이 되자 49년 4월 홍민표에게 2천만 원을 주며 수류탄 일만 개로 서울시 6만 당원으로 폭동을 일으켜 9월 20일에 인민공화국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런 계획이 승산이 없음을 알고 반대하다가 결국은 홍위원장이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자수한 후 서울시당 소속 16명의 핵심 간부들을 설득하여 전향케 하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전국에 남로당원들에게 자수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결과로 무려 33만 당원이 자수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남한의 공산당 활동은 거의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홍민표의 자수가 없었더라면 6.25 전쟁이 일어난 후 큰 혼란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남로당 서울시당 위원장 홍민표의 자수와 33만에 이르는 남로당 당원들의 자수야 말로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신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2021-06-16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6) 흥남 철수 작전이 기적

 

1950년 10월 1일에 감격 속에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 국경 가까이까지 진격하였으나 갑자기 한국전쟁에 투임 된 중공군을 만나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위 속에서 흥남부두에서 철수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철수 작전은 세계 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되었습니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 사이에 진행되었던 철수 작전에서 기적 같은 사례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경우입니다. 철수 당시 마지막 남은 상선이었던 빅토리호는 탈 수 있는 정원이 고작 60명인 작은 배였습니다. 그러나 피난민들을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당시 알몬드 장군의 군사 고문으로 있던 현봉학 씨의 간청에 따라 라루 선장과 47명의 선원들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와 짐을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 작은 배에 만 명 가까이 태우고 흥남항을 떠났습니다.

 

빅토리호는 28시간을 항해하여 부산항에 도착하였으나 피난민으로 가득 찬 부산항이 수용할 수 없어 80키로를 더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도착하였습니다. 항해 중에 아기 5명이 출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진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성탄절에 황량하고 차가운 코리아의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심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2021-06-17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7) 반공 포로 석방과 한미군사 동맹이 기적이다

 

6.25 전쟁이 휴전 회담이 시작되자 가장 뜨거운 감자가 포로 석방 문제였습니다. 전쟁 포로를 처리함에 있어 자유 송환이냐 강제 송환이냐가 문제였습니다. 유엔군 측은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고 공산군 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갈라진 이유가 포로들 중에 북한군 포로나 중공군 포로들 중에서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반공 포로들이 전체 포로들 중에서 절반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수용되어 있는 17만이 넘는 포로들 중에서 7만 명은 송환을 원하고 10만여 명은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이었습니다.

 

휴전 협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은 투철하였습니다.

〈국토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휴전이라면 차라리 한국군이 작전 지휘권을 되찾아 독자적으로 북진 통일을 이루겠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1953년 3월 5일 스타린이 뇌졸중으로 죽자 휴전 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의제가 포로 송환 문제였습니다.

휴전 회담이 대한민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가 놀라는 결단을 단행하였습니다.

 

바로 〈반공 포로 석방〉이었습니다.

유엔군 관리 아래 있는 전국 7개 포로수용소에 한국군 헌병을 보내어 26930명의 반공 포로들을 석방시켰습니다. 포로들이 탈출 도중 유엔군의 총격으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하였습니다.

 

이 뉴스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계가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었고 국민들을 높은 자부심을 품게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결단의 결과로 한미군사동맹이 체결되게 되었습니다.

이 대통령께서 단독으로라도 휴전을 깨고 북진 통일 하겠노라는 고집을 달래느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한미군사동맹을 맺어 공산군의 재침을 막아 줄 테니 휴전 회담에 반대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어 달라 하며 한미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합의하였습니다. 이 동맹이 성사되자 이 대통령은 안심하며 다음 같이 말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침략의 위협에서 벗어나 국가 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미군사동맹이 되었기에 우리는 경제 개발에 전념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에서 겪은 기적 중의 하나가 한미군사동맹입니다.( 2021-06-18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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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무엘상 17장 4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