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339 기독교와 18대 대통령

행복을 나눕니다 2012. 12. 24. 07:36

 

 

기독교와 18대 대통령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한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 33년 만에 다시 청와대로

 

 

 

 

 

➀ 박근혜 대통령 만든 ‘공신 크리스천들’

➁ 박근혜 당선인의 종교 관련 정책, 어떤 것들 있나

➂ 첫 여성 대통령 & 성경 속 여성 지도자 리더십

   ④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걸어온 길

 

    # 역대 어느 선거보다 치열했고 박빙이라 여긴 제 18대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투표 결과에 따른 각가지 이변에 모두가 놀라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버지께서 쓰실 사람을 뽑아 달라고 기도했다.

 

한국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서 아버지의 공과(功過)로 많은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잘 견디고 당선된 여성이다.

 

역사에 좋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를 바라고 기도하지만 영적으로 큰 교훈을 얻는다.

선거가 끝나고 나니 당선자에게는 무한한 기쁨과 영광이 따르고, 낙선자는 눈물과 한숨과 슬픔만 따르는 모습을 봤다. 아름다운 패자라는 말은 있지만 위로하기 위하여 붙인 말이고, 선의의 싸움이라도 이겨야 영광이 따른다.

 

인생살이도 전쟁이다. 모든 사람은 마귀와 싸우는 삶이고 사람 간에 경쟁이다.

믿음을 잘 지키며 이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영광을 누린다는 믿음이 더 해진다.

하나님 잘 섬기고 충성하다 하나님 앞에서 승리자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모든 사람을 축복해본다-이박준

 

*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➀    박근혜 대통령 만든 ‘공신 크리스천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캠프에는중책을 맡아 활약한 기독교인들이 많다. 캠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공개지지를 선언하고 외곽에서 지원한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다.

 

캠프 내에서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와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이 대표적인 기독교인이다.

 

충무성결교회 장로인 황 대표는

5선의 중진 국회의원으로 선거운동 기간 광주시당에 집무실을 마련하고 호남 지역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호남 득표율 10%를 돌파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당선인과 교계 지도자들 간 소통채널 역할을 했음은 물론 기독교인의 표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됐다.

 

여성 기업인이자 사랑의교회 집사인 김성주 회장은

캠프에 깜짝 합류해 솔직한 화법으로 선거운동 내내 화제를 모았다. 대학생들과 런치타임, 게릴라 토크콘서트 등을 통해 박 당선인이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대위 부위원장으로 활약한 이혜훈 최고위원 역시

사랑의교회 집사다. 이번 선거에서 경제정책 전문가로 활동한 그는 5년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박 당선인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포항 기쁨의교회 장로이자 새누리당 기독교인회 회장인 이병석 국회부의장도 선대위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선대위 대변인으로 활약한 박선규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서울 신길동 동천교회 집사로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기독신우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연세대 인요한 교수는

유서 깊은 선교사 집안의 후손이다. 외증조부인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은 광주에 제중병원을 세웠고, 조부인 윌리엄 린튼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아버지 휴 린튼은 한국에서 200여곳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다.

 

이밖에 박 당선인과 함께 당내 경선에 출마했다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정몽준 의원은 소망교회 집사, 안상수 전 인천시장은 감리교회인 인천 계산중앙교회의 권사다.

 

캠프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박 당선인을 지지한 교계 인사로는 박상증 목사가 대표적이다.

박 목사는 에큐메니컬 진영의 원로이자 시민사회운동의 대부로 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펼친 경력 때문에 박 당선인 측에서 영입에 상당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홍 서경석 목사는 각각 상임고문과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선진화시민행동을 통해 박 당선인을 지원했다. 박 당선인은 이 단체가 지난 10월 24일 개최한 대한민국선진화전진대회에 참석해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한편 1998년 박 당선인이 정계에 입문할 때부터 함께한 고 이춘상 보좌관은 동안교회 집사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지난 2일 강원도 유세 도중 발생한 교통사고로 숨졌다.

 

박 당선인은 20일 현충원 참배 후 이 보좌관의 유골이 안치된 경기도 고양 하늘문추모공원을 방문해 거듭 애도를 표했다.

 

*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➁   박근혜 당선인의 종교 관련 정책, 어떤 것들 있나

 

사학·대북·윤리 등 문제에 보수적 입장 지지할 듯 대한민국 제18대 대선 박근혜 당선인은 앞으로 종교와 관련해 어떤 정책을 펼까. 한국교회 주요 단체들이 대선을 앞두고 당시 후보자 신분이던 박 당선인에게 보낸 기독교 정책 질의서에 대해, 그가 답한 내용들을 살펴봤다.

 

한국교회 기관들은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종립학교의 종교교육권 보장 ▲대북관계 ▲종교자유의 보장 ▲동성애와 낙태, 안락사 등과 관련한 정책을 공통적으로 질문했었다.

 

◈종교사학=종립학교의 종교교육권 보장과 관련해 박 당선자는 “종립학교의 종교교육권을 인정하고 사학의 자율적 운영을 신장하기 위한 교육 관련 법령의 개정 및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 “노무현 정권시절 종교법인의 자율적 운영과 종교교육을 위축시키려는 사학법 개정안은 당시 한나라당이 대여투쟁을 통해 완화시킨 적이 있다”며 “종교사학의 투명성과 건강성을 함께 추구해 나간다면 종교교육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아울러 밝히기도 했다.

 

◈대북관계=이어 대북관계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구축이 중요하며, 경제사회 발전과 정치 안보협력의 조화와 균형을 바탕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도적 대북지원에 대해선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고 대화 국면으로 전환될 경우, 신뢰와 공존, 화해의 기조 위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 대북지원사업을 확대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주민들에게 정치적 상황과 구분해 인도적 문제는 지속적으로 해결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박 당선인은 “특히 영·유아, 산모, 노약자들에게 우선적인 지원과 종교계에서 벌이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도 최대한 활성화하도록 하겠다”며 “지원이 투명성 있게 추진되도록 할것”이라고 공약했다.

 

◈종교자유=종교자유와 관련해 각 종교 간 관계에 있어선 “종교계가 한국사회가 가진 다종교 사회로서의 특징을 창조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라며 “국내적으로는 종교 간 성숙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세계사적으로는 현재 문명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간 갈등과 분쟁 해결을 위한 혜안과 방안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최근 논란이 된 일명 ‘종교평화법’에 대해선 “종교평화법은 정부의 간섭 없이 종교 간에 대화와 신뢰를 통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종교계 합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뤄질 수 없다. 정부는 종교 사이에 편향시비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형평성에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전했다 .

 

◈종교재산=아울러 종단의 재산문제와 관련해선 “종단과 교회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고려해, 종교단체의 재산은 명의신탁 금지 특례대상으로 관련법에 첨가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며 “사회적 책임을 가진 종교의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종교유지재단으로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강조했다.

 

이 문제는 최근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소속 교회들이 실제 재산의 처분권은 교회가 가지면서도 그 명의는 교단의 유지재단에 있다는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당하면서 불거졌다. 기성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 교단들이 비슷한 형태로 유지재단을 운영하고 있어, 각 교단들은 자칫 이 문제가 한국교회 전체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한국교회 각 기관들은 대선 전 여야 후보들에게 이 문제를 일제히 질문했다.

 

◈동성애 및 생명윤리=다음으로오랜 논쟁의 대상인 동성애 문제와 관련, 박 당선인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없도록 하되 동성애자를 합법화하는 법률제정은 반대”라는 분명한 입장을 피력했다.낙태에 대해선 “태아는 비록 세상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사람과 똑같은 생명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만모체나 태아의 건강상 이유 등 특별한 경우엔 엄격한 기준으로 허용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박 당선자는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 “저소득층 기저귀·분윳값에 대한 국가책임 확대, 임산부 영양관리사업 확대, 한부모 가정양육비 지원 확대”를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이 밖에 안락사 및 존엄사에 대해서도 “윤리적·종교적·법적·의학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형제는 “사회의 법질서를 세우고 흉악범에 대한 경고가 되므로 존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박 당선자는 ▲근대 기독교 문화유산의 체계적 보호 및 활용지원 ▲종교 관련 예산의 공평한 편성 ▲공직자의 개인적 종교자유 보장 ▲국가와 공공단체의 토요일 시험실시 추진 ▲선교사역에 대한 정책당국의 인식전환과 지원책 강구 등을 약속했다.

 

 

➂   첫 여성 대통령 & 성경 속 여성 지도자 리더십

 

聖書로 본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 당선인의 시대적 소명 / 인애·진실·희생·절제·하나님 사랑…

 

대한민국에도 ‘여성 리더십’ 시대가 열렸다. 이는 부드럽고 온화한, 때로는 강단 있는 어머니와 같은 리더십으로, 군림하는 ‘보스형 리더십’과 구별된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는 여성 리더십을 성경 속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을 통해 재조명해봤다.

 

숭실대 교목실장인 김회권 목사는 20일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여성 지도자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면서 “남성 중심의 호전적이고 경쟁적인 리더십을 극복하는 대안적 지도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 꼽히는 인물은 에스더다.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르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음모로부터 동족 유대인을 구출한 여성 지도자다. 그녀는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포기하고 학살 위기에 내몰린 민족을 위해 굴욕과 고난당하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나라를 구해낸 지도자로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드보라는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지파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시키고 스스로 위험한 전장으로 내달렸던 살신성인의 지도자상을 보여준다. 두려움과 분열주의를 극복하는 여걸형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유다. 한나는 자신의 개인적 불행(불임), 즉 개인적 슬픔과 원한을 공적인 지도력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절망 속에서 인애와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킨 나오미와 룻은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성경 속 여성들이다.

 

성경 속 여성 지도자들의 리더십은 그 정신을 이어받은 크리스천 여성 리더들을 통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구현되고 있다.

 

목사의 딸이자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58). 그의 신앙 스토리를 담은 ‘그리스도인 앙겔라 메르켈’(한들출판사)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참된 목적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수시로 고백한다. 정치 현장에서 수많은 논쟁을 맞닥뜨릴 때마다 메르켈 총리는 성경 말씀을 비롯한 기독교적 가치를 인용, 국민과 당원들을 설득한다. 독일교회 프레스센터 폴커 레징 편집주간은 “메르켈 총리는 정치 현장에서기독교의 숭고한 가치를 행동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도 대표적인 기독 여성 지도자다.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이어온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자성과 절제, 근면과 성실, 자립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윤리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이 같은 기독교적 가치는 훗날 영국경제를 회생시킨 그의 대표적인 정책 ‘대처리즘’의 정신에도 묻어난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역시 대표적인 크리스천 여성 리더로 빠지지 않는다.

 

김 목사는 “현 시점에서 탄생한 첫 여성 대통령의 시대적 소명은 화해와 치유”라며 “모성적 온건 리더십을 통해 동서(지역 분열)와 남북(분단 상황)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민 대통합을 이루는 데 헌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④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걸어온 길

 

 

 

[박근혜 대통령 당선] 청와대서 부모 모두 총탄에 잃고… 33년전 동생 둘 데리고 떠나 고독의 세월 18년 끝에 정치 결심… 대통령 돼 청와대로 귀환

 

[박근혜가 걸어온 길]

中2때 청와대 들어가 전차통학,어머니 저격당해 숨진 뒤 22세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

10·26 뒤 신당동 집에 돌아와 아버지 10주기 맞춰 기념사업

2년 3개월간 당대표 지내며 사실상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유세 중 면도칼 테러 당하기도

올해 박前대통령 추모 행사서 "이제 아버지 놓아드렸으면…"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2월 청와대에 돌아간다. 33년 3개월 만이다. 신분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다.

 

◇학창 시절

 

그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대령 박정희와 육영수의 첫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2007년 실패 후 재도전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패했다.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고 했다. 이명박 후보는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더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친박(親朴)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은 무소속 또는 '친박연대'로 출마해 상당수 국회로 재입성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2009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8월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그는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4·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이어 과거사 문제로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9월 24일 기자회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10월 22일에는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이사진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중도 사퇴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의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막판까지 추격했지만, 박 당선인은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조선일보 김봉기 기자 입력 : 2012.12.20 03:02 | 수정 : 2012.12.20 18:15

 

*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