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부활,감사

15 영등포 국밥 산타

행복을 나눕니다 2011. 12. 28. 06:39

 

 

 

 

 

영등포 국밥 산타

노숙자들의 '털보 형님' 박희돈  목사. 그는 인생 전부를 퍼 주었다

인생을 바꾼 빨간 원피스 - 벌벌 떨며 쓰레기통 뒤지던 빨간 원피스 女노숙자 본 날

"퍼줄수록 채워지더이다"


'예수는 먼저 돌봤을텐데 난 왜 이리 무기력한가' 절망

노숙인 위해 거리로 나서니 - "목사님, 돌았나봐"

"목사님, 갑자기 왜?" 수군… 가족도 교인도 등 돌려

'3외 목회' 다시 꿈을 꾸다 - 외상 많고, 외롭고, 외길…

노숙인들을 새사람으로 "내 목표는 노숙인 대안학교"


박희돈 목사가 영등포역 앞에서 한 노숙자에게 떡국을 건네며.

"오, 좋은 옷 생겼구나! 못 알아볼 뻔했다, 야."


21일 저녁 서울 영등포역 광장 한구석. 박희돈(55) 목사는 줄을 선 노숙인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을한 그릇씩 건네며 고향 동생 대하듯 일일이 말을 걸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데다 빨간 방울모자까지 쓰니 산타클로스가 따로 없었다. "12월은 한 달 내내 산타 모자를 써요. 국 끓일 사골도 더 좋은 걸로 준비하고,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거죠. 예수님 생일잔치 차려 드리는 마음으로."


박 목사의 별명은 '영등포역 털보 형님'.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노숙인들 사이에 '영등포역 털보 형님한테 가면 밥 안 굶는다'는 얘기가 돌면서 붙은 별명이다. 노숙인들은 배식 20분 전쯤 미리 와서 박목사의 '밥사랑열린공동체' 밥차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식사 뒤엔 깍듯이 인사를 하고, 스스로 잔반을 버리고 빈 그릇을 모았다. 휴지 한 장 남지 않고 깨끗했다.


노숙인 출신으로 지금은 박 목사를 돕는 남경흡(55)씨는 "처음부터 이렇게 질서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했다. "난장판이었죠. 더 먹겠다고 싸우고, 다 먹은 그릇은 화단에 처박혀 있고…. 장사 방해된다는 주변 상인들 불만도 컸고요." 실랑이 끝에 싸움이 벌어진 적도 많았다. 국통에 소주병을 깨 넣고, 밥통에 모래를 붓는 이들도 있었다. 박 목사의 해결책은 '무조건 퍼주기'였다. "노숙인들은 이기적이고 의심 많지만 정에 굶주려 있죠. 베푼다 생각하면 안 돼요. 부모처럼 큰형처럼 아낌없이 퍼줘야지."


많은 노숙인이 이런 박 목사에게 끌려 '새 사람'이 됐다. 부산 건달출신으로 노숙인이 됐다가 2003년부터 그를 돕고 있는 조모(45)씨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어느 날 조씨가 '동거녀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도와주면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거예요. 자연분만일 거라 생각하고 병원에 갔는데 뜻밖에 제왕절개를 하느라 200만원 넘게 들었죠. 그때 돈 구하느라 좀 고생했죠." 조씨는 이후 술을 끊었다. 지금은 노숙인들 싸움을 말리고, 아픈 노숙인을 찾아 병원에 옮기는 일을 한다. 이렇게 박 목사와 함께하는 노숙인 출신 동역자만 7명이다.


박 목사는 성결대·총신대·서울기독대 등에서 신학을 7년, 사회복지학을 10년 공부해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여러 대학·기관에서 강의했고, 원자력병원 원목도 9년을 했다. 그런데 2001년 12월 중순, 평탄했던 그의 목회 생활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한밤중 영등포역 앞에서 한 노숙인 여성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영등포역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죠. 맨발 슬리퍼 바람에 빨간 원피스 하나만 입은 여자였어요. 추위에 덜덜 떨면서 쓰레기통에서 주운 컵라면을 허겁지겁 먹더군요." 여자는 그에게 "초저녁에 나오면 밥은 얻어먹지만, 남자 노숙인들에게 끌려가 성폭행당하거나 맞는다.


그게 무서워 아예 늦은 밤에 나온다"고 했다. 박 목사는 "눈앞이 캄캄했다. 명색이 목사인데, 예수가 가장 먼저 돌봤을 이들 앞에 내가 너무 무력했다"고 했다.


처음엔 당시 담임하던 교회 교인들과 김밥 60개를 싸서 매주 영등포역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김밥은 국밥이 되고, 60명분은 수백명분으로 늘었다. 주변에선 "돌았다"고 수군댔다. 좋은 아파트에 살며 비싼 차 몰던 목사가 갑자기 노숙인 사역이라니. '적당히' 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에, 교인도 친구들도 등을 돌렸다. 두 딸을 뒀던 부인과도 오랜 다툼 끝에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그 충격으로 왼쪽 귀가 먹었다.


박 목사는 아예 모든 걸 내던지고 영등포역 건너편 가난한 동네에 집을 얻었다. 노숙인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였다. 노숙인 교회도 세웠다. 그는 "가장 밑바닥까지 가난해졌을 때, 필요한 건 하나님이 다 채워 주셨다"고 했다.


박 목사의 노숙인 사역 한 달 예산은 2000만원 정도. 지금은 70~80명이 꾸준히 이 예산을 후원한다. 선배 목사들의 소개로 4년 전 재혼도 했다. 아들도 생겼다. 도봉산 계곡에 버려졌다가 등산객에게 발견된 사내아이를 입양기관을 통해 데려다 기르게 된 것이다.


박 목사는 "지금 노숙인 중에 IMF 때처럼 몰락한 중산층은 거의 없다. 고아였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 밑바닥 삶을 살다 흘러든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을 계기를 만들어 줄 '노숙자 대안학교'를 세우는 게 그의 목표다.


박 목사는 자신의 사역을 '3외 목회'라고도 했다. "외상 많고, 외로운, 외길 목회"다. "그래도 이렇게 밥과 국을 퍼주고, 노숙인 친구들과 눈 마주치며 웃다 보면 힘든 것도, 돈 떨어진 것도 다 잊어버려요." 배식이 끝나고 봉사자들이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를 거둬들였다. 밤이 깊어 추워질수록, 빨간 산타 모자를 쓴 '털보 형님'의 미소는 더 따뜻해졌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이태훈 기자 이메일 libra@chosun.com

입력 : 2011.12.24 03:03


 

* (막6: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 (사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