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청량리 588’을 희망 1번지로…
노숙자·부랑인과 25년 김도진 목사. 한 때 가장 어둡고 낮은 곳을
‘청량리 588’. 한때 세상의 가장 어둡고 낮은 곳을 의미하는 주소지였다.
윤락가와 우범지대로 대변되던 이곳에서 지난 25년 동안 노숙자, 출소자, 부랑인들의 아버지로 살고 있는 김도진(74·가나안교회) 목사. 그는 매일 서울역과 청량리역의 노숙인들을 만나러 간다. “힘들면 여기로 찾아와라 함께 살자. 나를 변화시킨 큰 형님(예수님) 이야기 해 줄게” 노숙인들에게 쉼터 입소를 권하는 그의 목소리는 투박하지만 형이 동생에게 말하듯 따뜻했다.
그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노숙인들을 인도하는 곳은 서울 동대문구 전농2동(속칭 청량리 588)에 있는 가나안교회 쉼터다.
사업 실패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자, 출소 후 오갈 데 없는 자, 가족들에게 버림 받은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200여명이 살고 있으며 그동안 1만여명이 이곳에서 쉼을 얻었다.
“그들은 인생의 반전드라마를 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주고 복음을 넣어주면 이들의 삶이 바뀝니다.” 김 목사는 누구보다도 어둡고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이들의 심정을 잘 안다.
빛의 자녀로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김성숙옹이 그의 할아버지다.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거지왕초, 깡패, 칼잡이, 알코올중독 등으로 얼룩진 ‘어둠의 자녀’로 살았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빚쟁이들을 피해 숨어든 기도원에서였다. 1979년 건축업을 하다 사기를 당했다. 사기꾼 일당을 찾기 위해 칼을 품고 찾으러 다녔다. 독기를 품은 남편을 보다 못한 아내가 남편을 기도원으로 이끌었다.
부흥회 사흘째 되던 날, 설교가 듣기 싫어 뒤돌아 앉아 있었다. 그때 강사가 “저 뒤에 돌아앉은 사람 뭐하는 사람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평소 성격이라면 욕하고 나가 버렸을 텐데 온몸에 전기를 맞은 것 같이 꼼짝하지 못했다. 강사가 두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순간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강한 빛을 받고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환상 중에 십자가를 지고 언덕 위를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너무나 위엄 있고 인자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란 고백을 했다.아주 짧은 순간, 42년간 지은 온갖 죄가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떼굴떼굴 뒹굴며 통회하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고 그동안 지은 죄의 용서를 구하듯 예배와 봉사의 시간을 보냈다. 80년, 44세에 기독신학교(현 백석대학)에 입학해 신학생이 됐다.
“청량리로 가라”
처음부터 청량리 588에서 목회할 생각은 없었다. 신학대학원 졸업을 1년 앞둔 86년, 기도 중에 “청량리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곳에서 살아나오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15평 정도의 작은 예배당에서 혼자 새벽예배와 철야예배를 드렸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동네 깡패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집기를 부수고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폭행했다. “어둠의 세계에 단련됐기에 견딜 수있었지요. 매일 아침 ‘아, 주님 오늘도 살았습니다’ 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7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청량리 지역 조직폭력의 중간보스가 찾아와 역전에 있는 청다방으로 오라고 했다. 집사 두 명을 대동하고 긴장하며 들어갔다. 놀랍게도 청량리에서 구두닦이, 껌팔이를 하며 성장한 이들이 동우회를 만들어 일일찻집을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모금한 400만원을 그에게 주며 “가나안교회가 진정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펴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동네깡패로 살았던 이들은 이후 청량리 역전 자율방범대를 발족해 동네를 순찰했다.
빈민의 집
96년 윤락가 포주들과의 마찰도 어느 정도 진정될 무렵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두 번째 결단을 요구하셨다.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7)는 말씀이 계속 생각났다. “쉼터를 찾아오는 노숙자들에게 1000원을 주면 소주를 사 마시고, 2000원을 주면 맥주를 사 마셨어요. 더 이상 돈을 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이들을 교회가 수용해야겠다고 결심하고 20평 남짓 되는 2층 교육관에 보일러를 놓고 노숙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어요.”
처음 20여명으로 시작한 노숙인 사역은 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확대됐다. 갈 곳 없는 사람은 누구나 오라고 알리는 현수막을 청량리역을 비롯해 서울 5곳에 내걸었다. 수용인원이 180명까지 늘었다. 더 이상 교육관에 재울 수 없어 성전 의자에 노숙인들을 재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노숙인 사역을 하자 일반 성도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200명이던 성도들이 10분의 1로 줄었고 그 자리를 200여명의 노숙인이 채웠다. 이후 지하 1층에 120평 규모의 생활관, 샤워실 등을 만들며 쉼터 시설을 갖추었다. 시에서 파견한 영양사와 간호사도 상근하게 됐다.
“쉼터 입소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술을 끊고 하루 두 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병치료, 주민등록 재발급 및 재등록, 개인파산 및 면책 지원, 취업상담까지 해줍니다. 현재 130여명이 개인통장을 소유하고 저축하며 살고 있어요. 이것이 진짜 복지 아닌가요. 쉼터는 잠만 재워주고 밥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을 얻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희망을 심어주고 살아갈 의욕을 줘야 합니다.”
희망 1번지
가나안 쉼터를 통해 숱한 노숙인들이 당당한 사회인으로 거듭났다. 쉼터 세탁실에서 일하는 김창두 집사는 새벽 4시30분부터 하루 종일 입소자들의 옷을 세탁하지만 피곤하지 않고 즐겁다. 한때 사업실패와 질병으로 자살기도를 했던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후 동역자로 산다. 몇 년 전, 노숙인으로 이곳에 들어왔지만 현재 교회찬양대 단장과 상담실장을 맡고 있어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이외에도 친구의 빚보증으로 횡령까지 한 이모씨는 가나안을 거쳐 광진구청에서 일한다. 장기간 실직과 폐질환으로 술에 빠진 장모씨는 재활에 성공, 회사에서 트럭을 몬다. 봉제공장 기술자로 열심히 일했지만 하반신 장애로 퇴사가 되풀이되자 남대문 ‘막가파’가 됐던 이모씨는 가나안으로 들어와 전동 휠체어를 받고 옷 수선업으로 다시 일어섰다.
“폐인이었던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기쁩니다.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반목회를 하는 분들은 모를 겁니다. 이곳에 머물면 결국 다 변합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교회운영에 기여하는 입소자들이 100명이나 됩니다. 또서울시로부터 저축왕 표창을 받은 입소자들도 있습니다.”
떠나보내는 교회
김 목사에겐 두 아들이 든든한 동역자다.
장남 정재 목사는 가나안교회 부목사로 교회의 모든 행정을 맡고 있다.
쉼터 사무국장인 차남 수재 목사는 지난해 미국 토렌스 미주가나안교회를 개척, 그곳에서도 도시빈민과 홈리스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정재 목사는 “아홉 살까지 술 취한 모습만 보여준 아버지, 그 뒤론 사역에만 매달려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았지만 평생 흔들리지 않고 이 사역을 해오신 아버지를 이젠 존경 합니다”고 말했다.
가나안교회는 성도들을 떠나보내는 교회다.
사회와 가정에서 외면당한 이들이 회복돼 가정으로 사회로 돌아갈 때 가장 행복하다.
가나안교회는 설립 25주년 감사예배를 드린다.
* (시27:0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가족이 함께 이 일을 한다는 것은 존경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둡고 희망 없는 곳에 밝은 희망을 주셔서 감격합니다.-이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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