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442. 중국 만주 ‘예수마을’

행복을 나눕니다 2014. 5. 7. 17:25

 

 

 

 

중국 만주 예수마을
감신대 이덕주 교수 논문 조선인들이 세운 구세동교회 사람들


 

일제강점기 종교탄압을 피해 중국 만주로 이주해 크리스천 공동체를 이루며 믿음의 씨앗을 뿌린 구세동교회 사람들을 주제로 한 논문이 나왔다. 이들이 척박한 땅에 세운 구세동교회는 일부 교회사 자료에 간략하게 언급돼 있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진 것은 처음이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연구팀은 지난 5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의 학술발표회에서 만주 구세동교회 역사와 유적답사 연구보고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0년대 초반 함북 길주 출신의 이종식씨 가족과 친척 등 10여명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 화룡시 팔가자진에 정착했다. 이곳은 중국 용정시에서 서쪽으로 30쯤 떨어져 있으며 가까이에 두만강 지류인 해란강이 흐른다. 이 교수는 일제시대 종교와 정치, 경제적 탄압을 피해 고향을 떠난 교인들이 이방인들의 땅에 개척한 예수마을이라며 한국교회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말했다.

초기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담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에는 이들이 중국인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마을 이름을 구세(救世)라고 지은 뒤 1913년 힘을 모아 예배당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 화룡현지명위원회가 1984년에 낸 문건에는 마을 대부분의 주민들이 예수교를 믿기에 원래 이름은 구세동(救世洞)이다. 1962(지명을) 풍산으로 고쳤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이 교수는 초기 정착민들이 구세주를 믿는 마을, 세상을 구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나중에 지명을 바꾼 것은 중국 당국이 기독교적 색채를 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세동에는 차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40여 가구가 함께 살게 됐다. 이들은 가난한 이웃을 한 가족처럼 도왔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일성수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1919913일 열린 함북노회의 간서시찰보고서에는 구세동에 여학교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있다.

일제는 1920년 중국 만주 일대에서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구세동교회와 마을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 때문에 문을 닫을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명맥을 유지하던 구세동교회는 해방 이후 폐쇄됐고 주민들은 남쪽으로 돌아가는 등 흩어졌다.

현재 이곳에 사는 30여명 대부분은 조선족이다. 구세동 신앙공동체의 직계 후손은 현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곳곳에 예수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100여명이 묻혀 있는 마을 인근 묘지의 일부 비석에는 십자가 문양이나 고인의 교회 직분이 새겨져 있다.

이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4월부터 1년여 간 현지를 찾아 구세동에 대해 연구했다. 구세동뿐 아니라 만주에 남아 있는 한국교회의 초기 흔적을 찾는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 교수는 7현재 구세동에 사는 조선족가운데 10여명은 인근의 교회에 다니는 등 믿음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20;28)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교회는 건물이 있고 사람이 모인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고 우아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이름으로 예배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피 흘려 죽어주신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단체에 불과합니다. 또 규모가 큰 교회에 출석하면 더 우월한 신앙인인줄알고 우쭐대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건물이 있거나 없거나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전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개인이나 조직을 높이고 이익만 강조한다면 그런 곳은 바른 교회가 아닐 수 있으므로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이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