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86 이런 효자도 있어요

행복을 나눕니다 2009. 3. 9. 07:26


이런 효자도 있어요
어머니는 소풍중이라는 책도 쓰고
'12년째 식물인간 된 어머니와 언제나 대화하고 간호하는 효자'
나와 같이 어머니 간호하면 안 될까요?라는 메일 보낸 사람과 결혼
힘들어서 울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기도 할 때는 울어요

 
나이든 이(老)를 자식(子)이 등에 업는 글자가 효(孝)다. 5000년 넘게 우리 민족의 혈관으로 이어지던 그 글자가 사어(死語)처럼 된 세상이다.

 

머리 희어지고 피부에 주름 생기면
팔자 나쁜 이는 홀로,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이는 요양원 같은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걸 우리는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세상에 한 젊은이가 '엄마는 소풍 중'이라는 책을 냈다.
2004년에 나온 이 책은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를 7년 동안 돌본 간병(看病)일기다. 아버지도, 여동생도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아들은 맡았다. 어머니는 안 굶어도 아들은 굶었고 누워있는 어머니 앞에서 아들은 비틀거렸다.

 

책이 나온 지 5년 뒤 이 보기 힘든 효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의 한 병원의 8인실로 황교진(39)을 따라갔다. 아들은 반듯이 누워있는 어머니 신영애(61)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신문사에서 취재 나오셨어요. 괜찮으니까 놀라지 마세요."

 

어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놀랐는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눈은 천장에 고정돼 있다. 1997년 뇌출혈로 쓰러지고 수술을 받은 뒤 12년째 어머니는 이런 모습이었다. 세상이 '식물인간'이라 부르는 그 어머니를 아들이 계속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지자 아들은 건축학과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이미 결정돼 있던 진로를 '간호(看護)'로 바꾼 것이다.

 

병원 몇 곳을 옮겨 다닌 뒤 결국은 집에서 돌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딸은 많지 않은 돈이라도 벌기 위해 일을 했고 간호는 아들이 맡았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어머니를 매일 아침 목욕시켜드리고 목을 관통해 있는 호스에 하루 6번 열량을 계산해 죽을 드렸다.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안마를 하며 혹시 가래가 끓어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아들의 하루 24시간이 고스란히 바쳐져야 했다.

 

황교진이 말했다. "엄마, 눈 한번 깜박여보세요." 어머니가 눈을 깜박였다. 아들이 또 말했다. "엄마 한번 더." 어머니의 눈이 또 한번 감겼다 떠졌다. 아들은 휴대폰에 있는 15개월 된 자기 아들 사진을 보여줬다. "엄마, 영승이야. 많이 컸지?"

어머니의 눈이 사진을 따라간다. 아들은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 "컨디션이 정말 좋을 때는 손자 사진에 어머니 입 꼬리가 올라가요."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쓰러진 다음에 황씨나 황씨의 여동생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신씨는 손자를 안아 본 적도, 직접 본 적도 없다. 그래도 손자는 사진만으로도 할머니를 움직였다. 잠시 엿본 아들과 어머니의 데이트에는 뭔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아들은 목에 낀 가래를 빨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게 석션이라는 건가요?

"네. 목에 가래가 엄청나게 많이 끓어요. 그걸 빼드리고, 목을 청결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옛날 집에서는 만날 해드렸는데. 어머니가 이렇게 되신 지 12년 되었는데, 피부나 눈동자가 맑잖아요. 처음 쓰러지셨던 1997년에는 뭘 몰라서 당황했는데, 지금은 알고 있는 것을 못 해드려서 괴로워요. 집에서 24시간 간호하면서 모실 때는 수년 동안 생리도 하셨었어요."

 

■계속 무슨 얘기를 하시네요?

"네. 청력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요. 항상 재미있는 얘기, 옛날 추억 얘기를 자주 해드립니다."

 

■어떤 얘기를 좋아하시나요.

"어머니가 쓰러지시기 전까지 새벽에 시장에서 장사를 하셔서 마주칠 일이 없었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광장시장에서 숙녀복을 파셨는데, 새벽에 장사하시고 오후에 집안일 하시고 밤에 출근하는 걸 반복하셨어요. 쓰러지고 난 뒤에야 알고 보니 병원도 안 가고 두통약만 드셨더라고요. 그러시면서도 저에게 오히려 밥을 잘 먹고 다니느냐는 말씀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이나마 '엄마, 나 밥 뭐 먹고 왔어' 이런 말을 해드려요. 손자 얘기도 해드리고."

 

■의식이 있는 겁니까?

"병원에서 말하는 의식은 좀 다른데요. 저는 소통하고, 교감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병원에 왔을 때 표정이나, 손 잡고 기도할 때 움직임, 돌아갈 때 애쓴다고 말하는 게 전달이 돼요. 저도 어머니 표정을 보면 귀가 가려운지, 배에 대소변이 쌓여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집에서 모셨을 때 어머니는 정말 깨끗했어요. 그때는 한번에 250킬로칼로리 이상인지 계산해서 하루 여섯번 죽을 드리고, 플레인 요구르트도 드리고."

 

■그런 기록은 다 써놓으셨나요?

"그럼요. 물어보시는 분이 있으면 다 알려드려요. 예를 들어 손은 안 쓰면 어떤 일이 생기냐 하면, 손톱 밑의 살이 올라와요. 그거 깎는 방법이 있고, 머리 감겨드리고 잘라드리는 법이 다 있죠. 어떤 의사가 제가 간호하는 걸 물끄러미 보더니, '아트(art)다, 아트' 이런 적도 있어요. 흐하하."

 

말하는 도중 아들은 어머니를 옆으로 돌려서 등을 치고, 다시 옆으로 들고 등을 치고, 손을 매만지고, 팔을 주물렀다. 아들은 이것이 '운동'이라고 했다. 식물인간이라고 해서 식물처럼 물만 줘서는 안 되며, 이렇게 몸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 영승이하고 며느리는 처가에 있어요. 대구에 갈 일이 있는데 그때 데리고 올라올 거예요. 아버지는 마산 가셨어. 친척들 만나고 올라오신대. 나 그리고 어제 대구에서 KTX 타고 올라왔어. 대구까지 1시간 45분이면 가. 놀랍지."

 

조잘조잘 아들은 어머니에게 얘기한다. 어머니의 얼굴은 참 편안하다.

황씨는 "1997년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그때는 못 견뎠다"며 "그러고 보면 사람이 앞날을 모르고 하루하루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7년간 어머니 간호만 하다가 책을 내고 세상에 나온 2004년 이후 5년 동안 아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인터뷰 장소를 황씨 집으로 옮겼다.

 

■책은 많이 팔렸습니까.

"네. 과분하게도 베스트셀러는 아니더라도 굿셀러 정도는 된대요. 강의 요청을 많이 받는데 강의 들으면서 우시고, 그런 분들도 많이 사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꽤 유명세를 탔죠?

"2004년에 책 나가고 갑자기 그런 반응이 나올지는 몰랐어요. 당시 유영철 사건 났을 때고, 카드 빚 자살 사건이 뉴스에 나올 때인데요. 흉흉한 분위기 때문인지, 많은 곳에서 인터뷰하자고 연락이 왔었어요. 근데 좀 하다가 말았어요. 매일매일 하다 보니 간호에 소홀해지잖아요."

 

■책은 어쩌다 쓰게 된 거죠?

"교회에 다니는데요. 거기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걸 보고 누가 따로 홈페이지를 만들라고 권유했어요. 그래서 간병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입소문으로 퍼졌어요. 많은 분들이 '삶이 좀 특이하니까 위로도 해주고 싶어해서 왔는데, 힘내라고 하려 왔다가 힘 얻고 간다고 하신다' 이런 글을 남기고 가시더라고요. 그때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씨와도 알게 됐습니다. 친해졌죠."

 

■책을 내기는 쉬웠습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무작정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는데 3개월 만에 냈거든요. 메일로 될 확률이 0.1% 정도 된다던데. 이상한 게 소원이 세개 있었는데 신학대학원 가서 공부하는 거, 좋은 배우자 만나 결혼하는 거, 세 번째 책 내는 것이었어요. 어려운 순서였는데, 이게 뒤바뀌었어요."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됐죠.

"취직한 경위부터 말씀드려야 돼요. 대성그룹의 김정주 대성닷컴 사장님이 제 책을 읽으셨대요. 이분의 어머니가 제 어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쓰러져서 서울대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셨대요. 저를 홍보팀으로 취직시켜주시고 원고를 쓰는 일을 맡기셨어요. 1주일에 며칠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것도 해주시고.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직업 없이 살다가 직장인이 된 거죠."

 

■그럼 직장 다니면서 아내를 만났나요.

"아니, 그것도 어머니와 관련이 있어요. 취직은 했지만 제 수입의 상당 부분이 어머니 치료비로 나가요. 나중에는 언젠가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인데. 그걸 감당할 사람이 있겠냐고요.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호스피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했던 아내(남존희35)가 저에 대해 알게 된 뒤 메일을 보냈어요. 제가 보통 받는 메일이 '제 부모님이 아픈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지는 '제가 교진씨와 차를 마시면서 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이런 내용인데요, 아내의 메일은 '어머니 간호를 같이 할수 있을까요'였습니다."

 

■그 뒤는 일사천리로?

"당시 경기도 이천의 병원에 있던 어머니를 간호하러 가면서 아내와 같이 갔어요. 그게 데이트가 됐어요. 병원 냄새도 나고, 손에 대소변도 묻히게 됐지만 싫은 기색이 없었고요. 알고 보니 아내는 제가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장애물이 디딤돌이었습니다. 2007년엔 아들도 태어났어요."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네요

"그렇죠. 주변 친구들, 친지들이 '쟤는 젊은 나이에 청춘을 다 쏟아 버리고, 어떡하느냐'이렇게 걱정했는데, 이젠 그런 걱정들 안 하죠."


 ■ 황교진씨는 손을 못 쓰는 사람은 손톱 아래 살이 자라기 때문에 조심해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직접 집에서 하루 24 시간 간호할 때는 어머니 손톱이 아프지 않은 사람과 완전히 똑같았다.며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황씨는 결혼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심을 보고 결혼할 줄 알았는데 얼굴보고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참 밝았다.

 

12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간호한 사람의 웃음이 그랬다. 자신의 책에 "잠시 외출했다가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갑옷과 투구를 썼다"고 비장하게 쓴 사람답지 않았다.

 

■언제 우십니까.

"어머니가 있는 장소에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습니다. 기도를 할 때 흘리죠. 이런 상황에서 보호자는 굉장히 밝아야 합니다. 치매 환자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경우, 옆에 있는 사람은 더 밝아야 해요. 그러자면 많이 웃어야죠. 원래 내성적인 측면이 많았는데 바뀌었어요. 친구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많이 곁으로 와요. 저와 많이 나누고 싶어하고. 제 비결이 그거였어요. 혼자 울고 사람들 앞에서 웃는 거."


■본인 건강은 챙깁니까.

"회사 들어가서 처음으로 건강 검진이라는 걸 해봤는데 근육량이 엄청 높은 걸로 나오더군요. 건강해요."

 

■어머니가 언젠간 돌아가시겠죠.

"뇌출혈로 인한 식물인간 상태입니다. 그러나 뇌사는 아닙니다. 뇌사는 산소호흡기 끼고 장기 이식해야 하는 상황이고. 어머니와 비슷한 증세의 환자는 대개 1~2년 버팁니다. 보통 욕창, 패혈증, 저산소증으로 돌아가세요. 그만큼 간호가 힘든 거죠. 2년 넘긴 케이스는 보호자가 엄청나게 신경을 많이 쓴 경우밖에 없어요."

 

■이런 질문드리기 죄송합니다만,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연장시킨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그 단어는 안 써도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 분들이 제가 간호하는 거 보면 그런 말씀 안 하세요. 어머니가 편안한 얼굴을 하시는 게 보이거든요. 감히 그런 말씀을 못 하시더라구요."

 

■존엄사에 대해 찬성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

"찬성 반대의 문제는 아니에요. 저는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장도 이해해요, 오죽 했으면. 그 사람들의 삶과 비슷한 걸 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논의가 좀 이르다고 생각해요. 끝까지 모시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복지제도가 선진국만큼 갖춰진 다음이라면 괜찮겠지만. 저는 (존엄사가 아니고) 책임을 지는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인데,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왜 사랑이라고 안하고 효라고 할까요. 많은 사람이 안 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당연해야 하는 것이죠. 아 진짜,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너는 진짜 효자다' 이거예요."

 

그는 책을 또 써볼까 생각 중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얘기, 자기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해줄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황씨는 또 죽음을 앞둔 사람이 평안하게 갈 수 있도록 돕는 호스피스 연구를 더 하려 한다.

 

집에서 인터뷰를 마치는데 벽에 창문 크기로 걸려 있는 황씨의 아들 사진이 눈에 확 띄었다. 눈이 또랑또랑하다.

 

■아들이 참 예쁘네요.

"아 그렇죠."

■아기가 좋은가요, 어머니가 좋은가요.

"아니. 저기. 그 질문은 처음 받는데요. 아기는 정말 예쁜거고, 어머니는 정말 사랑하는 거죠. 흐하하하."(사진-제주양지꽃)


■ 2009년 2월 2일 서울 영등포의 한 병원에서 '효자' 황교진(38)씨를 만났다. 지난 97년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를 12년째 돌보고 있는 황씨. 그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어머니께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   정성진 기자
sjchung@chosun.com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입력 : 2009.02.07 03:15 / 수정 : 2009.02.07 0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