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4503. 우리말 성서 번역 선각자

행복을 나눕니다 2024. 9. 3. 00:00

 

우리말 성서 번역 선각자

한국 복음화 길을 열다. 첫 한글 성경 번역자 이수정과 곡성 옥과

 

멀리 노령산맥 괘일산 정상이 보인다.

곡성 옥과 출신으로 괘일산 자락에 살던 이수정은 이 길을 통해 한양을 드나들었다. 유현종 소설 ‘들불’에서는 부산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이수정이 전도한 매서인들이 동학농민전쟁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지난달 26일 종일 비가 내렸다.

한국 개화기 선각자이자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인 이수정 선생의 궤적을 찾아 산길을 헤맸다.

노령산맥 설산(525m)과 괘일산(440m) 사이 고갯길이었다.

이수정 태생지인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이수정연구회 오주현 목사(곡성 성산교회)와 정병영 실장(옥과고교)이 동행했다.

 

 

이수정 (1842~1886·생몰 추정)

 

한국교회사에서 이수정은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이다. 그는 1883년 7월 일본에서 성서 번역작업 등을 추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문안드립니다’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 편지를 미 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발송했다. 그의 편지 일부는 그해 12월 미국 선교 잡지 ‘더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게재됐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전도 여행 중 마게도니아인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6~10)는 호소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가 유럽 복음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는데 이수정도 이처럼 “우리가 불행히도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며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일본 기독교인들과 함께한 이수정(앞줄 왼쪽부터 다섯 번째).

 

이수정은 1882년 실력자 박영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기독교인이자 유명 농학자였던 쓰다센으로부터 개화 및 기독교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쓰다센은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불빛이 이 방안을 비추는 불빛이라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이 세상을 비추는 태양과 같아서 이 세상 그늘진 곳까지도 다 비추일 수 있다.”

 

이수정(뒷줄 중앙)과 그를 전도했던 낙스(뒷줄 왼쪽 첫 번째) 선교사.

 

이수정이 세례받은 도쿄 노게스초교회 현재 모습. 당시 낙스 선교사가 입회했다.

 

이수정은 이듬해 4월 도쿄 노게스초교회에서 선교사 낙스의 입회 아래 야스카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그곳에 머물며 한문성경 ‘현토한한신약전서’에 이어 1885년 2월 국한문 성경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번역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첫 한글 번역 성서를 들고 두 달 뒤 제물포에 당도하는 것이다.

 

미 선교잡지 ‘포렌 미셔너리- 저팬 엔 코리아’(1884년 9월)의 기록에도 이수정 얘기가 나온다.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개종한 한국인들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선교본부는 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임명했다.…(언더우드는) 동경에 있는 한국인 신자에게 잠깐 한국말을 배울 것이다.’

 

조선의 첫 세례자와 다름없는 이수정의 호소가 갖는 여파는 하나님 주관하심을 실감케 한다. 한·미 친선 보빙사의 미국 방문(1883년) 때 조선 사절단을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조선 선교를 결심했던 가우처 총장과 재일 선교사 매클레이(1824~1907)를 움직인 것이다. 이수정 선교 편지에 감복한 가우처가 매클레이를 조선에 보낸다. 고종을 만난 매클레이는 ‘의료’와 ‘교육’ 개방의 성과를 얻어낸다. 이수정과 고종 측근 김옥균 라인에 의해 1884년 7월 국가 차원의 기독교 문명 개방이 이뤄졌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부터 1886년 별세하기까지 4년여를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오군란으로 쫓기던 명성황후를 보호해 공신이 됐다가 갑신정변에 참여, 순교했다는 기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실증사학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성경 번역 작업을 행한 일본에서의 행적은 확실하나 태생과 순교 등은 검증이 덜 된 상태다.

 

태생지는 서울과 곡성 옥과로 갈린다. 2013년 학술연구보고서(개신대학원·곡성군)는 일본 동경어학교 교사였던 이수정이 앓아눕자 옥과에 사는 아버지 이병규가 일본을 방문했다(1885년 12월 15일자 일본 시사신보)는 내용 등을 근거로 옥과로 추론하고 있다. 여러 구전도 옥과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사망과 관련해서 교계는 순교(‘명치학원 백년사’의 추모문)로 단정 짓는다. 병사설(이노우에 가쿠고로 글)과 배교설(백낙준 박사)도 있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결론은 아니다.

 

미국 성서공회 잡지에 실린 이수정 번역 ‘주기도문’.

 

어쨌든 ‘한국의 마게도니아인’ 이수정은 첫 한글성서 번역자이다. 이 성서를 바탕으로 천대받던 백성은 문맹을 탈출했다. 그리고 평등사상 확산과 신분질서 타파로 이어졌다. 근대역사연구 관점에서 이수정은 ‘개화파 선각자’이다. 그의 성서번역으로 기독교 문명이 도래했고, 그의 진보적 사상으로 근대 ‘의료·교육’이 뿌리내렸다. 한국 교회가 이수정을 ‘첫 한글성서 번역자’로 묶으면 안 되는 이유다. ‘개화사상가 이수정 선생’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 싶다.

 

이수정이 옥과에서 한양으로 출향하던 괘일산 조선 옛길. 임도로 이용된다.

 

‘설산·괘일산 고갯길’은 이수정이 옥과현(縣) 집에서 출발해 순창 전주 공주 천안 등으로 이어지는 한양길 첫 고개다. 사료를 종합하면 왕족 전주이씨 이수정 가문은 정치적 이유로 깊은 괘일산 중턱 마을에서 숨어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정치적 해금을 맞은 이수정 부자가 이수정의 나이 스무 살이 넘어 출향의 기회를 잡고 옥과~순창 고개를 숱하게 넘었다는 것이 향토사연구가들의 주장이다.

 

현재 이수정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성림청소년수련원(광주 성림침례교회)이 자리한다. 이는 옥과 출신으로 일경의 박해를 피해 이 산자락에서 절 공부를 했던 우암학원 조용기(94) 설립자의 증언 등에 따른 것이다. 그는 남부대학·전남과학대·옥과고교 등을 세웠고 현재 옥과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 1903년 설립된 이 지역 첫 교회 옥과교회는 이수정기념실을 두고 있다.

 

옥과장로교회 1층의 이수정기념실. 사진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옥과에 닿기 전 옛 여산현(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들렀다. 여산 읍치(邑治)는 천주교 순교지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스토리텔링에 강했다. 조선말 헌종·철종·고종 시기 산 기독교 개화사상가 이수정. 한국교회는 그 예언자를 기리지도, 그렇다고 연구하지도 않는다. 개교회 중심의 한국교회에 막혀 고개 넘기가 힘들다.

 

국민일보 곡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입력 : 2021-02-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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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20-21)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사람이 해치려 해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성공합니다.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지만, 욕심으로 나타나는 경쟁은 약육강식 하는 밀림의 동물들보다 더 살벌한 모습을 보이는 시대입니다. 거짓말로 비방하고 끌어내리다 못해, 못된 짓을 해서라도 자기만 살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보입니다. 이는 부모 형제간도 예외가 아니 듯 합니다.

 

요셉이라는 소년은

형들의 이기심 때문에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며 애굽으로 팔려가 숫한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여 애급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형들이 동생 요셉을 만났을 때는, 흉년의 때에 곡식 구하려 애급에 갔다가, 우연히 동생 요셉을 만나게 되어, 가족이 모두 애굽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나,

아버지인 야곱이 계실 때는 잘 지낼 수 있었으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므로, 형들은 불안 했습니다. 총리인 동생으로부터 보복 당 할 것이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참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害)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의 위기를 대비하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지고 형님들과 가족을 돌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제들을 위로하고 용서와 화해를 선언합니다.

 

▶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잔꾀로 자기 유익을 챙기려 하면, 오래지 않아 전부 헛수고가 되고 부끄러움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정하시면, 사람이 아무리 해치려 해도 안전하게 성공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성공한 요셉은 형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화평을 선언한 것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케 하시고 구원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한 사랑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며 주님의 사랑을 닮는 삶은, 성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이박준

(lee7j7@daum.net) (lee7j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