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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5. 인천 상륙작전 이야기

행복을 나눕니다 2016. 8. 17. 06:29



인천 상륙작전 이야기

(1) 우리가 발로 얻은 정보 갖고 맥아더가 상륙지점 결정

(2) 영화 '인천 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1) 우리가 발로 얻은 정보 갖고 맥아더가 상륙지점 결정

[인천 상륙작전 성공시킨 '엑스레이 작전' 수행한 노병 김순기]

 

해안포 위치·북한군 병력 파악

상륙작전 성공한 뒤엔 맥아더 옆에 서서 인천 들어가

해군 창군 70명 중 11963년 퇴역 뒤 일본 가 생활

90세 청춘 김순기(90)씨가 지난 10일 일본 교토의 자택 앞 텃밭에서 지팡이를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맥아더와 함께 행군하던 19508월이 아닌 아내와 이렇게 사는 지금을 꼽았다.

90세 청춘 - 김순기(90)씨가 지난 10일 일본 교토의 자택 앞 텃밭에서 지팡이를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맥아더와 함께 행군하던 19508월이 아닌 아내와 이렇게 사는 지금을 꼽았다. /교토=김수혜 특파원

 

1950816일 스물 넘긴 청년 17명이 손톱·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잘라 군() 사물함에 넣었다. 이틀 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어선을 구해 엿새 걸려 인천 앞바다까지 왔다. 배가 뜨기 전까지 지휘관을 뺀 16명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작전명 '엑스레이'. 임박한 연합군 상륙 작전에 앞서 적이 점령한 인천에 침투해 정보를 모으는 임무였다. 824일 새벽 130분 장교 4명과 사병 6, 군무원 7명이 인천 영흥도 십리포에 몰래 내렸다.

 

그 뒤 3주간 22세 지휘관 함명수 소령을 도와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24세의 김순기 중위다. 작전이 확정된 뒤 함 소령이 맨 먼저 부른 사람이 전쟁 전 인천경비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김 중위였다.

 

지난 10일 아흔 살 김 중위를 일본 교토에서 만났다. 관객 6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그와 연결됐다. 그는 개성 사투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행복한 세상이 오도록 선조들이 고생한 거 알아주면 좋갔어."

 

그는 "함 소령은 지휘자, 나는 필드 워커(field worker)였다"고 했다. 십리포에 내린 날 밤 김 중위는 인천 시내에 잠입해 전쟁 전부터 술친구로 지냈던 '인천 건달' 권상오씨와 접선했다. 북한군 보안원으로 위장(僞裝)해 부역하고 있었던 권씨가 통행증을 만들어와 대원들의 시내 잠입이 가능해졌다.

 

그는 "우리가 보낸 정보를 갖고 맥아더 사령부가 정확한 상륙 지점을 결정했다"고 했다. 대원 일부는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공사 현장, 방어 진지 구축 공사장에 인부로 들어가 북한군 병력과 장비를 파악했다. 다른 일부는 서울 근교와 안양·서산까지 오가며 주민들 사이에 섞여 북한군 위치와 이동 상황을 알아냈다. 그는 미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 대위와 함께 배를 타고 해안선을 염탐했다. 어느 지점에 해안포가 있는지, 부두 내벽 참호 병력이 몇 명인지, 기관총은 어디 있고 고사포는 몇 문인지 샅샅이 파악해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들은 3주 뒤 철수할 때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17명 중 2명이 전사했다.

 

적진에서 보낸 숨 막히는 3주간을 돌아보며 '아흔 살 김 중위'"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무섭진 않았다"고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엑스레이에 투입된 한국 해군 첩보부대의 장학수 대위(이정재 분·뒷줄 맨 왼쪽)와 부대원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엑스레이에 투입된 한국 해군 첩보부대의 장학수 대위(이정재 분·뒷줄 맨 왼쪽)와 부대원들. /CJ E&M

그는 전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얘기를 더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용사였어. 미간에 총알이 박혀 죽었지. 남은 우리는 상륙 작전이 성공한 뒤 맥아더 장군 옆에 서서 인천에 들어갔어. 그길로 서울 거쳐 압록강까지 올라가다 해군에 복귀했어."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인천 송도중을 졸업하고 194511월 손원일 제독이 세운 '해방병단(海防兵團)'에 들어갔다. 해군 창군 멤버 70명 중 한 명이다. 1963년 중령으로 전역한 뒤에는 배도 타고 무역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인 소개로 만난 일본인 사치코(幸子·68) 여사와 사이에 아들(38) 하나를 뒀다.

 

전쟁사 학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인천은 갯벌이 넓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딱 두 시간, 만조에 물이 들 때 상륙해야 하는데 그 사이 적군이 대항하면 우리가 궤멸할 수 있었다."(임성채 해군 역사 기록 관리단 군사편찬과장)

 

기적에 기여한 게 엑스레이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항공사진, 통신 감청 같은 현대 과학기술로도 할 수 없다. 우리 군이 두 발로 뛰는 인간 정보를 담당했는데, 그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 김순기 중위였다."(함명수 제독)

 

그때 목숨을 걸었던 노병들이 그 뒤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디 있는지 우리 정부는 모르고 있다. 지휘관 함 소령을 제외하면 다른 노병의 증언이 나온 것도 이번 인터뷰가 처음이다. 작전 참가자 중 국방부가 이름을 파악한 사람은 10명뿐, 나머지는 '7'이라는 숫자로만 남았다.

조선일보 교토=김수혜 특파원 입력 : 2016.08.12 03:06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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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 '인천 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는 비상한 智力·엄격함·독선으로

수많은 찬사와 비난 동시에 받아아시아에 집중한 최초의 전략가

전략적 영감으로 인천 상륙 감행해 꺼져가던 작고 가난한 나라 살려

그는 존경받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다. 지력은 독선에 묻혔고 전술적 탁월함은 상명하복 무시로 빛을 잃었다. 엄격함은 주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했다. 당연히 애칭도 없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종종 앞뒤가 안 맞아서 매일 성경을 읽고 자신을 교황과 함께 이 세상 그리스도 왕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교회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찬사와 그 이상의 비난을 한몸에 받은 더글러스 맥아더 이야기다.

 

미국 역사에 그를 가두면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된다. 오만함의 영역에서 그의 국내 경쟁 상대는 조지 워싱턴과 링컨 정도다. 장군들의 전쟁사로 넓혀 보면 나폴레옹이 그와 어깨 높이가 비슷하다. 둘 다 참모가 필요 없는 비상한 두뇌로(나폴레옹은 듣는 척은 했다)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건 몰라도 밑에서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이다. 집안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주지사였고 아버지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필리핀 총독이었다. 그는 나중에 일본 총독이 된다.

 

일본 패망 한 달 후 일본 국왕이 그를 찾아왔다. 군 작업복 차림의 맥아더는 예복을 갖춰 입은 일왕과 다정하게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맥아더는 일왕보다 키가 45나 컸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신이 꼬맹이처럼 찍힌 그 사진을 보고 무너져 내렸다. 맥아더는 그렇게 가학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일본에 심으려 했던 것은 낯설고 생소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였다(실은 강요에 가까웠지만). '자유와 민주를 기반으로 아시아인의 운명은 아시아인들에게.' 그의 모토였다. 일본 최후의 쇼군(將軍)으로 불렸던 맥아더에 대한 일본인들의 숭배는 거의 광적이었다.

 

'맥아더 장군님께'로 시작하는 편지와 선물이 한 해에만 44만 통이나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 성인의 거의 1%가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벌어진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맥아더도 그런 일본이 싫을 리 없었다. 6·25가 터지기 전까지 5년 동안 그가 도쿄를 떠난 것은 딱 두 번뿐이다. 마닐라와 서울에서 열린 독립기념식에 참석할 때였는데 그나마 당일로 돌아왔다. 대통령 후보가 아쉬웠던 공화당에서는 몇 차례 그를 본국으로 초청했다. 맥아더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단 몇 주일이라도 귀국한다면 미국이 동양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태평양 전체에 퍼질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자아도취 발언은 유사 이래 맥아더뿐이다. , 누구나 할 수는 있다. 남들이 웃어서 그렇지.

 

맥아더에 대한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77년이다. 맥아더 역()은 그레고리 펙이 맡았는데 평점도, 흥행도 별로였다. 무엇보다 그레고리 펙은 '휴일'에나 어울리지 '전쟁'에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가 천의 얼굴이라고 하지만 착착 붙는 역할이라는 게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역할을 맡은 리엄 니슨은 데뷔작부터가 '엑스칼리버'의 기사 역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보면서 맥아더의 연극적인 대사가 거슬린다는 분들이 있다. 실제 맥아더가 그랬다. 그는 언제나 배우처럼 행동했고 늘 카메라 렌즈를 의식했다. 항상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설정이었다.

 

그는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선글라스 아닌 안경을 쓴 맥아더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집에서는 거의 안경을 쓰고 지냈다. 말투도 그렇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슬픔과 흥분을 말할 때면 높고 가늘게 올라갔다. 연극 대사처럼 드라마를 만들어 가며 말하는 것은 그가 반대자들을 설득할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영화에도 나온다. 듣다 보면 말려 들어간다).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자리가 끝나고야 얘기를 나눈 게 아니라 얘기를 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가 아니라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에 진출했어도 성공했으리라 믿는다. 이 달변이 안 먹힌 유일한 인물이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주로 이야기했고 맥아더는 예스와 노 할 틈만 겨우 얻었다.

 

맥아더는 로마를 모델로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제국의 집정관이자 총독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집정관과 총독 자리를 자기가 알아서 그냥 했다. 미국 역사상 한 개인에게 이렇게 무한대의 권력이 허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시아에 집중했던 최초의 군 전략가였다. 유럽만 중시하던 워싱턴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었다. 현재 미국에 가장 중요한 곳은 아시아다. 안목일까 영감이었을까. 인천 상륙은 영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판단 못 내린다. 그리고 그 영감이 꺼져가던 작고 가난한 나라를 살렸다(이 표현은 식상하다. 우리는 더 이상 작지도 가난하지도 않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고마움을 모르는 민족에 좋은 날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조선일보 이철원 일러스트기자 입력 : 2016.08.11 03:12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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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 전쟁에는 정보가 꼭 필요하고, 승패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승리해야 합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그렇지만 모든 분야에서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쟁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가 있어도 정보전에서 밀리면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최신 정밀 장비로 정보 수집을 한다지만 그래도 사람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적국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의 정탐 군들의 보고가 둘로 나눴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고 보고하는 쪽이 더 많고,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보고는 겨우 두 사람입니다. 보고가 왜 이렇게 나눠졌느냐 하면, 불가능하다고 하는 쪽은 연약한 자신들만 봤고, 가능하다는 쪽은 지금까지 자기들을 인도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같았는데 믿음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불가능을 보고한 사람들은 승리를 맛보지 못하고 중도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능을 보고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나안을 점령하고 왕성하게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힘써 하되 자기 힘만 생각지 말고, 지금까지 우리 가운데서 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면, 영육 간의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서 승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믿음 따라 능력 나타내시며 일하십니다.-이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