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4. 현실적 이야기들,,,
현실적 이야기들,,,
(1) 미국이 화내는 건 무섭지 않나
(2) 인천상륙 老兵에 경례하지 않는 나라
(3) [문갑식의 세상읽기] 國軍을 불신하는 나라의 장래가 궁금하다
(4) '필리핀 이모'는 왜 안 되나.
(1) 미국이 화내는 건 무섭지 않나
사드 반대 여야 의원들, 중국 보복만 걱정할 뿐
미국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어… 워싱턴은 찾아갈 생각도 안 해
美에도 아시아는 '핵심적 이익'… 오래 인내하지는 않을 것
30여 년 전 한국과 미국 사이에 무역 마찰이 극심했다. 미국은 한국산 TV 등 여러 품목에 무역 보복을 감행했다.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협상과 대화가 진행됐다. 우리는 막후 접촉을 통해 보복의 총알을 맞을 품목을 줄일 수 있었다.
미국 정부도 레이건 대통령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서울 강남에 메리어트호텔이 문을 열었다. 기자들 앞에선 화를 내면서 방 안에서는 웃으며 식사하고 거래를 마무리했다.
그러던 미국이 얼굴빛을 바꾸고 나타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정책을 놓고 클린턴 정부와 티격태격했다. 북핵 사태의 초창기였다. 정상회담 도중 김 대통령은 "그만 끝내자"는 말까지 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화를 낸 셈이다.
때마침 무역 적자로 달러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일본계 은행들이 한두 달 만에 수백억달러를 한꺼번에 빼가더니 뉴욕의 미국 은행들은 한국의 구원 요청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워싱턴에 가보라고 했다.
결국 미국과 일본이 요구한 것을 다 내주고도 긴급 수혈을 받지 못했다. 그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그다음 날 미국이 파견한 '면접관'이 서울에 왔다. 재무부 차관이었다. 그는 신임 대통령이 김영삼 정부가 약속한 개방 계획을 그대로 실행할 것이라는 서약을 받았다. 그 뒤 일주일 만에 IMF가 달러를 수혈해주기 시작했다. 많은 한국인에게 망각의 화면 속으로 사라져버린 얘기다. 하지만 미국이 화를 내면 어떤 재앙이 닥친다는 것을 그때처럼 절감한 적은 없었다. 미국과 일본의 연동작전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릇 나쁜 망아지를 닮은 한국을 길들이기 위해 미·일 간에 어떤 비밀대화가 오갔는지는 그 뒤 많은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미국이 화를 폭발시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여러 단계를 거친다. 처음엔 자기네 요구 사항을 웃는 얼굴로 설명한다. 그것도 다양한 통로를 이용한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당사자들을 초청해 현장 견학을 시켜주며 설득한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던 괌의 사드 기지를 한국 기자들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슬슬 위협을 가하며 부분적인 타협을 시도한다. 1980년대 무역보복을 하면서도 뒤로는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 계단을 넘어설 때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마지막엔 IMF 사태로 번지는 것이다.
지금 사드발(發) IMF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기껏 중대 규모의 부대 배치 문제로 미사일 방위청장까지 서울에 달려온 것을 보면 미국은 아직 웃으며 설득하는 단계이다. 이런 인내와 설득의 시간이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자기네 국토와 국민을 지켜주려는데 한국이 왜 이러느냐는 불만이 곧 터져 나올 듯하다.
우리는 중국의 보복만 걱정하고 미국은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나섰던 새누리당 경북·대구 출신 국회의원 21명이나 중국으로 쫓아간 더민주당 6인방도 미국은 아예 안중에 없었다. 워싱턴을 찾아가 사드의 진실이 뭔지, 한반도에 꼭 필요한지 되묻고 자신들의 반대 논리를 설명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사령관을 국회에 불러 미군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처음엔 전자파 괴담에 휩쓸리다 그게 먹히지 않자 중국과 관계를 걱정하고 나섰다.
오바마 대통령이 석 달 전 히로시마원폭기념공원을 방문했을 때의 화면을 보라. 그의 곁에는 핵전쟁에 대비해 24시간 대통령을 수행하는 핵가방을 든 비서가 있다. 원자폭탄 피폭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오바마는 또 히로시마를 방문하기 전 미국의 원폭 설비를 최첨단으로 업그레이드하는 1조달러 프로젝트에도 서명했다. 핵 폐기를 외치며 노벨 평화상을 탔으면서도 국가 안보에는 개인 소신을 꺾은 것이다.
한국에서 사드 논란이 지속되더라도 미국은 인내하며 기다릴 것이다. 오키나와 후텐마 공군기지 이전 문제도 10년 이상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은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무너지는 유럽에 비해 떠오르고 있는 아시아 시장에 미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그런 경향은 더 뚜렷해졌다. 하지만 아시아를 중국의 압도적 패권 아래 놔둘 수는 없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핵심적 이익' 중 하나인 한국을 지키기 위해 언제까지 참지는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중국 외교를 잘못한 것은 다 알고 있다. 그게 밉다고 미국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중국의 보복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미국이 화를 낼 줄 모르는 나라라고 오판해선 안 된다..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 [송희영 칼럼] 입력 : 2016.08.13 03:17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2) 인천상륙 老兵에 경례하지 않는 나라
1950년 8월 24일 20대 첩보부대원 17명이 인천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몰래 내렸다. 작전명 '엑스레이.' 이후 3주간 이들이 적군 치하의 인천에 잠입해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9월 15일 연합군 7만5000명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다.
그 주역 김순기(90)옹을 인터뷰한 곳은 일본 교토에 있는 한 쇼핑몰 휴게용 의자였다. 장바구니 든 주부들이 왔다 갔다 하는 한쪽에서 귀가 어두운 김옹과 2시간 동안 목청을 돋워가며 6·25 얘기를 했다.
주변은 연립주택과 목조주택이 밀집한 서민 동네였다. 김옹은 자택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래도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 인터뷰 뒤 '바래다 드린다'는 핑계로 뒤따라갔다. 그의 집은 예닐곱 가구가 한데 모여 사는 낡은 공동주택이었다. 한 집당 10평 남짓 돼 보였다. 집 안 좀 보자는 말이 안 나왔다.
김옹은 1945년 11월 해군 창군 멤버 70명 중 1명으로 군복을 입었다. 6·25 당시 우리 군이 낙동강까지 밀려갈 정도로 어려웠을 때 목숨을 건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그런 그가 지금 국가에서 받는 지원은 월 2만엔가량이다. 충무무공훈장 두 건을 받은 데 따른 수당이다. 근속 20년이 되기 전에 전역해 군인연금은 없다. 우리 정부는 그를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초대하거나 '증언을 듣자'며 찾아간 적도 없었다. 그나마 그는 작전에 참가한 노병 17명 중 복무 기록이 남아 있는 4명 안에 든다. 6명은 이름 석 자만 있고, 7명은 아예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김옹 자신은 정작 뭘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생활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만족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3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상륙작전 현장에 방문하고 싶었는데, 주변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어 못 갔다고 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업고라도 모셔갔어야 했다.
조선일보 김수혜 도쿄 특파원 [기자수첩] 입력 : 2016.08.13 03:00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3) 國軍을 불신하는 나라의 장래가 궁금하다
성주 참외 변이 걱정하는 이들
原電 근처에서 나는 대게 굴비는 무서워서 어떻게 먹고
레이더 전자파 쏟아내는 공항은 겁나서 어떻게 가나
자기들 생명 지켜주는 국군의 말도 믿지 않으니 이러고도 나라 온전할 수 있나
정안호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장은 만나자마자 네 건의 문건을 내밀었다. 하나같이 두툼한 분량이었으나 주제는 동일한 것이었다. '종말(終末) 단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missile)', 우리나라 전체를 분열로 몰아넣고 있는 사드(THAAD) 미사일에 관한 상세한 설명 자료였다.
정 소장과 나는 2011년 9월 처음 만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艦)에 당시 해군 제7기동전단장이었던 그와 동승해 부산~마라도~이어도~평택항까지 2박3일 동안 취재했던 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 사이 그는 별 하나를 더 달아 소장(少將)이 됐고 영토 수호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됐다.
그와 동행한 이들은 대령 두 명과 정치학박사 한 명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국민이 사드와 관련된 국군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제주항 건설 때부터 하도 여러 번 겪어 익숙해질 만한데 그때마다 생경(生硬)한 상황을 또 맞이하게 됐다. 국군을 믿지 못하는 국민이 누구에게 자기 목숨을 지켜달라고 할지 정말 모르겠다.
사드는 공중 40~150㎞에서 최대 200㎞ 반경으로 북한의 미사일을 요격(邀擊)하는 무기다. 성공률이 100%이며 미군도 2008년부터 본토에 4개, 괌 기지에 1개 포대를 배치했다. 북한 미사일이 날아올 때면 이스라엘의 미사일 방어망 '아이언 돔(Iron Dome)'이 우리 언론에 등장하지만 사드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게 정설이다.
사드 반대론자들은 북한 미사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이 무기를 세 가지로 왜곡한다. 첫째 검증되지 않았다. 둘째 해로운 전자파가 나온다. 셋째 중국을 자극한다.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금세 탄로 날 거짓말이 통하는 이유는 하나다. 음모론과 허구에 목숨 거는 '못된 버릇'이 한 번도 '사실(事實)의 철퇴'를 맞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드는 1995년부터 개발됐다. 2005년부터 11번의 요격 시험평가를 해 100% 성공률을 보였다. 21년째 성능을 개선하고 있는 이 미사일에 대해 의심 많은 이들은 '뭔가 불안하기 때문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거기엔 이런 답이 제격이겠다. "1950년대 초 배치된 미군 B-52 전략폭격기는 60년이 넘도록 시험평가를 받고 있다."
전자파가 그렇게 두렵다면 우리는 TV도, 전자레인지도,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쓰지 말아야 한다. 거리 곳곳의 통신장비가 뿜어내는 전자파 때문에 좀비처럼 변하고 싶지 않다면 집 밖에 나서지 말고, 지하철을 타는 대신 걷는 게 좋다. 사드 1개 포대보다 더 많은 레이더가 설치된 공항도 겁나니 해외여행의 꿈도 접어야 한다.
성주 참외가 변이(變異)를 일으킬 게 걱정된다면 원자력 발전소 옆에서 생산되는 울진 대게나 영광 굴비도 멀리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어 울진 대게나 영광 굴비 맛을 못 본다고 화내며 '흙수저' 신세를 한탄한다. 사실 대신 상상에 의지하면 이렇게 앞뒤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는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중국이 자국 감시용이라고 화를 낸다면 고개를 굽실대고 벌벌 떠는 대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북한의 의주·온양·삼지연·강감찬산·청강읍에 설치된 북한 레이더부터 제거하라." 북한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에 미사일과 레이더를 설치해 중국 영토 500㎞ 이상을 24시간 365일 빼놓지 않고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생각한다면 성주에 내려가 헌법 1조를 운운하며 영화 '변호인'의 팬임을 드러내기에 앞서 "왜 수도권이 사드 방어망에서 제외됐는가?" "북한 미사일로부터 서울과 경기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제 혈세로 제 생명을 지켜달라고 만든 국군을 안 믿는 국민, 그 괴물 같은 나라의 말로(末路)가 정말 궁금하다..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입력 : 2016.08.13 03:15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4) '필리핀 이모'는 왜 안 되나
10년 전 아이가 태어나자 당장 육아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어린이집은 24개월 미만 아기를 받아주지 않았고, 지방에 계신 부모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 역시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유일한 대안은 입주 가사도우미를 두는 것뿐이었다. 수소문 끝에 중국동포 출신 아주머니를 고용해서 2년쯤 아이를 맡겼다. 월급으로 120만원을 줬다.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맞벌이 부부가 느끼는 육아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변한 것이 있다면 입주 도우미 월급만 껑충 뛰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아이를 낳은 동료 여기자는 '조선족 이모' 월급으로 한 달에 200만원이 나간다고 울상을 지었다. 한국인을 고용하면 250만원은 줘야 한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나 물가가 훨씬 높은 나라지만, 입주 도우미를 쓰는 일에 관해서라면 한국보다 부담이 훨씬 적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출신 외국인 가사도우미 덕분이다. 이들의 월급은 보통 600~700싱가포르달러이고, 여기에 정부에 내는 고용부담금 270달러를 합쳐도 총비용이 900달러(약 70만원) 남짓이다. 싱가포르인에게는 그리 많지 않은 돈이지만, 동남아 여성 근로자 입장에서는 고국에서 버는 돈의 몇 배나 되는 큰 액수인 데다 숙식까지 해결된다. 그래서 싱가포르 전체 122만 가구에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23만명에 이른다. 1~2인 가구를 빼면 집집마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사도우미용 작은 방이 따로 딸린 아파트도 흔하다.
싱가포르 정부는 1970년대부터 가사도우미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자국 여성의 육아 부담을 줄이고 경제활동 참여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이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70년대 40%대이던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은 60%대까지 올랐다. 한국은 50%대 초반에 머물고 있다.
인구 절벽을 코앞에 둔 한국에서도 가사도우미를 수입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얼마 전 발표한 논문에서 "30대 워킹맘 대다수가 저임금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의사가 있으며, 시장이 개방되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10%포인트 이상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정부도 이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 중이다. 한쪽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 제고와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문호를 개방하자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비숙련 여성 일자리 잠식, 젊은 가사도우미로 인한 가정불화 우려 등을 들어 반대한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사례로 볼 때, 이런 우려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사소한 문제에 가깝다. 또 아예 가사도우미 시장을 개방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월급 200만 원짜리 중국동포는 허용하면서 70만원짜리 필리핀 출신은 금지할 이유도 없다. "보육은 나라가 책임질 테니 아이만 낳으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엔 어쩔 수 없이 가사도우미에게 아기를 맡기고 직장에 나가는 여성의 경제적 부담이라도 줄여줘야 한다.
조선일보 최규민 싱가포르 특파원 [기자의 시각] 입력 : 2016.08.13 03:14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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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모든 사진은 내용과 무관합니다-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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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119:61-62)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 하리이다.
# 어려울 땐, 당황보다 차분함이 더 효과적입니다.
대부분 어려움에 처하면 그 문제만 보고 당황합니다. 그렇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닌데.... 좀 차분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서둘러야 될 일은 신속히 대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 박자 늦추며 그 원인과 대처 방안을 검토해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성령님께서 지혜와 능력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길을 안내합니다. 그러므로 잠자다가도 말씀이 생각나면 그 말씀 붙들고 감사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암송해두면 나이가 많아서도 삶에 큰 도움이 됩니다.-이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