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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 고마운 숨은 영웅 70인, 광복 70주년

행복을 나눕니다 2015. 8. 17. 07:49

 

 

 

 

 

 

고마운 숨은 영웅 70, 광복 70주년

당신들이 있어 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독립운동 도움 준 외국인들 - 이승만 외교·臨政(임시정부) 도운 '광복의 은인들

6·25전쟁 도운 외국인들 - 목숨 걸고 한국 지켜낸 '파란 눈 태극戰士

교육·과학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 반도체 기술 개발·카이스트 설립에 차관 제공

문화·체육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 88올림픽 개최 이끌고한글·K팝 우수성 전파

경제·산업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 '한은법' 초안 제작現重에 조선기술 전수

의료·봉사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 私財 털어 국내 첫 대형의료원 키운 모펫선교사

 

 

 

독립운동 도움 준 외국인들

이승만 외교·臨政(임시정부) 도운 '광복의 은인들

 

 

 

 

미국 피치 목사 상하이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백범 탈출 도와.

영국베델 양기탁과 일제 침략 고발

중국 쑨커 해외에 한국 독립 거론

올해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고마운 은인이 너무나 많다. 광복과 건국 그리고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주요 고비마다 헌신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을 선정하고, 지면을 통해 뒤늦은 감사 편지를 보낸다. 때로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정확한 생몰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묵묵히 한국을 도왔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들(Hidden Heros·히든 히어로즈)’이다. 본지는 이들과 유족에게 감사패와 기념 선물(갤럭시탭S)을 전달할 예정이다.

 

"날마다 왜놈들이 우리 동포들을 잡으려고 미친개처럼 돌아다녔다.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녀 단체인 애국부인회까지도 아예 집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제는 백범 김구를 체포하려고 현상금 20만원을 내걸고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일제는 임정이 있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 수색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 합작으로 다시 현상금 60만원을 걸었다. 절체절명의 체포 위기에 내몰린 백범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와준 은인이 미국인 목사 조지 피치(1883~1979)였다.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난 피치는 한국 독립운동 가들에게 온정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일(反日) 정신이 강했다.

 

피치는 1909년 뉴욕 신학대 졸업 이후 상하이에서 YMCA 간사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윤봉길 의거 직후에도 피치는 보름이 넘게 2층 전체를 백범 일행에게 내줬다. 피치의 부인은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고 일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영문으로 작성했다.

 

일제 끄나풀이 피치의 집 주변을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정탐하자, 백범 일행은 결국 상하이 탈출을 결심했다. 피치 목사는 차량 운전사로 변장했고, 김구와 피치의 부인은 나란히 부부처럼 뒷자리에 앉아 마당에서 차를 몰고 나왔다. 프랑스 조계를 지나 중국 지역과 연결되는 다리에 이르러서야 피치의 자동차는 멈췄다. 차에서 내린 백범 일행은 미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짐 꾸러미를 들고 다리를 건넜다.

 

훗날 김구의 '변장 탈출'로 알려진 사건이었다. 1937년 일제의 난징(南京) 대학살 당시에도 피치는 참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코트 속에 감추고 탈출을 감행했다. 이듬해 그는 미국 전역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했다. 피치 부부는 광복 이후 한국에서 김구 선생과 행복하게 해후(邂逅)했다. 그는 한국과 대만 YMCA에서 활동하다가 1961년 은퇴했다.

 

한국의 광복을 염원했던 모든 외국인이 피치처럼 행복한 결말을 보았던 건 아니다. 구한말 당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양기탁 선생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의 침략을 고발했다. 하지만 일제의 부당한 압력으로 1907년부터 두 차례나 법정에 선 끝에 1909년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베델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구한말 고종 황제를 보필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도움을 줬던 호머 헐버트도 이 묘원에 나란히 묻혀 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미국의 아시아 외교 전략 수정을 미국 정부에 건의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광복 후에도 미군정과 국무부에 한국 입장을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193·1운동의 열기 속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광복까지 26년간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이 기간 임정을 따뜻하게 맞아준 건 중국의 반일 운동가들이었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의 아들 쑨커(孫科)1942년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과 중한(中韓)문화협회를 조직했고, 국제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했다.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발행일 : 2015.08.14

 

 

6·25전쟁 도운 외국인들

목숨 걸고 한국 지켜낸 '파란 눈 태극戰士'

 

 

 

 

전쟁고아 1000명 살린 - 블라이스델

유일한 6·25 종군기자 미국 히긴스, - 전역 돌며 "한국 돕자" 캠페인 벌여

戰功 세운 터키, '형제의 나라'

 

 

     마가릿 허긴스 종군 여기자

 

올해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고마운 은인이 너무나 많다. 광복과 건국 그리고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주요 고비마다 헌신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을 선정하고, 지면을 통해 뒤늦은 감사 편지를 보낸다. 때로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정확한 생몰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묵묵히 한국을 도왔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들(Hidden Heros·히든 히어로즈)’이다. 본지는 이들과 유족에게 감사패와 기념 선물(갤럭시탭S)을 전달할 예정이다.

 

"그들은 마치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1950823일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지()에 실린 6·25전쟁의 전황 보도 중 한 줄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주일 전 북한군 2개 연대가 경남 통영 시내를 기습 공격하자 한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반격에 나선 '통영상륙작전'을 다룬 기사였다. 이때 해병대의 활약에 강한 인상을 받은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사진)가 기사에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국내 신문이 이를 번역해 보도하는 과정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우리 해병대를 대표하는 수식어로 쓰이고 있다.

 

마거릿 히긴스는 6·25전쟁을 취재한 300여명의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기자였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한국 땅을 밟은 뒤 6개월간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전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여자를 함정에 태우지 않는다는 미군의 방침에 맞서 "갑판 위에서 자겠다"며 버텨 승선을 허락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광주광역시의 충현원에는 6·25전쟁 당시 고아 1000여명을 구출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동상이 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2007년 이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자신의 회고록 판권을 넘기는 등 계속 한국의 고아들을 도왔다. 광주광역시의 충현원에는 6·25전쟁 당시 고아 1000여명을 구출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동상이 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2007년 이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자신의 회고록 판권을 넘기는 등 계속 한국의 고아들을 도왔다. /김영근 기자

 

미국에 돌아온 뒤인 1951년 그간 취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War in Korea)'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캠페인은 미국 젊은이들로 하여금 한국을 위해 참전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역시 6·25전쟁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사진기자 맥스 데스포도 히긴스와 함께 전쟁의 실상을 알린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히긴스와 데스포가 전장을 누빌 때, 미 공군의 군종장교로 참전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은 온 서울을 뒤지며 수송기와 트럭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군대가 후퇴하자 블라이스델 대령도 자신의 책임 아래 돌보던 전쟁고아들을 탈출시켜야 했다. 그는 제5군 사령부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부사령관을 설득해 일본에 있던 C-54 수송기 16대를 김포공항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미 공군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전쟁고아 탈출 작전 모습. 1069명의 생명을 구했다. 미 공군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전쟁고아 탈출 작전 모습. 1069명의 생명을 구했다. /충현원 제공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항까지 아이들을 태울 차량도 없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시내에서 수송 임무 중이던 해병대 트럭을 발견하고 "상부 명령"이라고 속여가며 아이들을 태웠다. 극적으로 공항에 도착한 블라이스델 대령과 고아들은 제주도까지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살아난 고아와 보육교사는 총 1069. 이 작전은 공식 미군 전사(戰史)'유모차 공수작전(Kiddy Car Airlift)'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을 위해 묵묵히 싸운 전사(戰士)들의 공도 컸다. 19512월 중공군의 공세를 꺾은 지평리 전투에서 필사의 총검 돌격을 감행한 프랑스군을 지휘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령, 미 해군 정보장교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큰 공을 세우고 서울탈환작전 중 녹번동 일대에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그런 용사 중에서도 빛나는 이들이다.

 

6·25전쟁 때 터키군 1개 여단을 이끌고 참전한 타흐신 야즈즈 준장도 부산·수원 등에서 북한군을 격퇴했고,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UN군의 후위에서 퇴각을 엄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와 터키군의 분전 덕분에 오늘날 한국과 터키 사람들은 서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며 가깝게 여기고 있다.

공동기획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권승준 기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교육·과학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반도체 기술 개발·카이스트 설립에 차관 제공

 

 

 

대한민국이 ICT(정보통신기술) 강국이 되기까지도 숨은 외국인 영웅이 있었다. 이집트 출신인 마그디 이스칸더 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아시아국장은 우리 정보산업의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우리 정부는 1976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정책 목표로 반도체 기술 개발과 정보산업 육성을 설정하고 전문 연구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문제는 연구 시설 도입이나 기술 훈련에 필요한 돈이었다. IBRD 아시아담당 국장이었던 이스칸더는 2900만달러 차관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초 IBRD는 도로··교량 같은 인프라 투자에 집중했기 때문에 첨단 기술 연구소 설립에 대한 차관 제공에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스칸더는 일부 이사국의 반대에도 차관 제공을 성사시켰다.

 

그는 "후진국에서도 반도체와 컴퓨터를 개발해 선진국의 기술 독점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전신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설립은 그의 덕분이다. KIET'디지털 강국 코리아'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부는 20024월 이스칸더에게 산업포장을 수여했다.

 

존 한나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으로 카이스트 설립에 필요한 교육 차관을 제공했다. 우리 정부가 450만달러를 요청하자 그는 600만달러로 고쳐 제출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존슨 대통령 과학기술고문인 도널드 호닉은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도왔다. 파독 광부·간호사 교육에 헌신한 알로이스 베커, 선진 경영학 교육 기반을 만든 찰스 길리랜드 등도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이다.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발행일 : 2015.08.14

 

 

문화·체육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88올림픽 개최 이끌고한글·K팝 우수성 전파

 

 

 

미국인 돈 밀러(Miller·1920~1996)는 서울올림픽 개최에 큰 기여를 한 공로자다.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 현장 조사에 참여한 그는 서울에 우호적인 평가보고서를 작성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IOC 위원들의 압도적 서울 지지를 이끌어냈다.

 

1981328IOC 조사단으로 미국 올림픽위원회(NOC) 사무총장 돈 밀러와 영국 NOC 사무총장 리처드 파머가 내한했다. 밀러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주한미군에 배속돼 2년간 근무했던 친한(親韓) 인사였다. 그는 25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의 발전상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IOC로 돌아간 그는 서울을 개최지로 결정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서울은 대도시로서 편의 시설 등 인프라 구축이 잘돼 있는 반면 나고야는 비교적 작은 도시로 정비는 잘돼 있으나 시골 풍경이 많다. 서울은 대부분 경기장이 건설 중이나 나고야는 제반 시설이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결국 1981930IOC 총회에서 서울은 52표를 얻으며 27표에 그친 나고야를 눌렀다.

 

문화 분야에서도 숨은 외국인 공로자가 많다. 'KSL 네트워크'2010년 독일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한류 관련 단체다. 아시아나 영미권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K팝 변방에 머물렀던 독일에 한류의 저변을 확대했다. 영국 민속학자 존 레비는 1960년대 한국 민속음악 자료를 모으고 전통음악을 녹음해 에든버러대학에 컬렉션을 만들었다. 로버트 램지는 미국 대학에 한국어를 보급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전파했다. 제임스 게일은 구운몽·춘향전 등 고전 작품을 영어로 최초 번역했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발행일 : 2015.08.14

 

 

 

경제·산업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한은법' 초안 제작現重에 조선기술 전수

 

 

 

 

능동 어린이대공원에는 군복 입은 외국인의 동상이 서 있다. 6·25 전쟁 때 포항 전투를 승리로 이끈 존 콜터 장군이다. 참전 이후에는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의 단장을 맡아 전후(戰後) 한국의 재건을 주도했다. 단순한 원조가 아니라, 미 원조 당국이 반대했던 산업 기반시설의 자금 지원으로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는 데이비드 콜 하버드대 교수(2)와 이르마 아델만 버클리대 교수(2·3)가 기여했다. 1965년 내한한 에드가 맥보이는 '한국의 인력 개발 및 활용계획안'을 작성해 한국의 인력 양성에 기여했다.

 

현대 한국의 경제사(經濟史)엔 이처럼 미국인의 이름이 많이 보인다. 아서 블룸필드는 한국은행의 독립을 강조한 한은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칼 밀러(민병갈)1952년부터 27년간 한국은행의 고문을 맡으며 국제기관 공조를 이끌어냈으며, 한국에 귀화해 천리포수목원을 설립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산하 간부였던 조엘 번스타인은 1960년대 미국의 한국 원조 계획을 담당했고, 육종학자 헨리 비첼은 통일벼 개발 연구에 참여해 보릿고개 해소에 힘을 실었다.

 

영국인 윌리엄 던컨은 1970년대 현대중공업에 파견돼 조선(造船) 기술을 전수했고, 이탈리아인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포니' 자동차를 디자인해 한국형 승용차의 초기 모델을 제시했다. 포항제철로 대표되는 한국 제철의 초기 역사에는 일본인 두 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야스오카 마사히로는 포철과 일본의 협력을 성사시켰고, 신일본제철 감사역이었던 아리가 도시히코는 기술 컨설팅을 맡으며 포철의 성장에 기여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15.08.14.

 

 

 

의료·봉사 분야 도움 준 외국인들

私財 털어 국내 첫 대형의료원 키운 하워드 모펫선교사

 

 

 

 

오늘날 대한민국의 의료 성과는 눈부시다. 그 바탕엔 앞선 의료 기술과 시스템을 한국으로 들여와 보급하고, 희생과 봉사를 마다 않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1948년 대구 동산기독병원 원장을 맡은 하워드 모펫(한국명 마포화열·1917 ~2013)은 사재(私財)와 해외 모금액을 털어 병원에 최신 의료 시설과 장비를 갖췄다. 병상 1000개를 마련해 동산병원을 국내 최초 대형의료원으로 키워나갔다.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 행정직원까지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나환자들을 위해 그들 머리카락을 눈썹에 옮겨 심어주는 수술도 도입했다.

 

고종의 서양의학 어의, 제중원 4대 원장, 세브란스병원 원장 등을 지낸 올리버 에비슨

(1860~1956)1908년 조선 최초의 면허 의사로 졸업생 7명을 길러냈고, 캐나다 내과의사 스탠리 마틴은 1915년 중국 지린성 룽징에 제창병원을 세우고 독립군 치료에 힘썼다. 1947년 한국에 들어와 22년간 인술(仁術)을 펼치며 기생충 박멸에 앞장선 폴 크레인, 1954년부터 35년간 한국의 결핵 퇴치에 헌신한 루이스 린튼도 있다.

 

오스트리아 수녀 마리안 스퇴거는 1962년부터 40년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돌봤다. 도로시 프로스트는 흙벽돌집을 지어 난민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줬고, 안톤 트라우네르 몬시뇰은 교육원(사랑의 집무료 조산원을 세워 전쟁고아·난민·장애인을 도왔다. '조선 고아들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는 20년 넘게 1000여 명의 고아를 키웠고, 데이비드 존 실은 36년 동안 빈민 복지, 암환자 치료에 헌신했다. 하이디 브라우크만은 원주 가톨릭병원을 설립했다.

조선일보 김경은 기자 발행일 : 201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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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 나라가 세워지고 없어지는 것이나, 국가가 부강하고 발전하는 모든 일은 어느 특정 지도자 한 두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사람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전개되고, 수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쓰임 받는 것을 봅니다.

대한민국만 해도, 광복과 발전을 위하여 국내외의 다양한 분야 숨은 일군들이 한국을 도왔습니다. 사람이 수단으로 그렇게 연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면 겸손해야 하며 감사와 보은(報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정치하는 분들이나 전후 세대들은 자기가 뭔가를 이룰 줄 알고 함부로 교만할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이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