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야기

313 고아들에 ‘꿈’ 심어주는 푸른 눈 할머니

행복을 나눕니다 2012. 8. 23. 06:23

 

 

 

 

고아들에 ‘꿈’ 심어주는 푸른 눈 할머니

30년 가까이 한국 땅에서 독신으로 연금 받아 살면서, 스위스 출신 인진주씨


스위스 간호사 출신의 마가레트 닝게토(66) 할머니는 평생 나눔의 삶을 실천해왔다.

30년 가까이 한국 땅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한국의 고아와 장애인에게 사랑을 나눴고, 지난 93년부터는 국제구호 NGO 월드비전을 통해 29명의 해외어린들을 후원하고 있다.


그가 결코 부유하거나 넉넉해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은 아니다. 2001년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후 간호사일을 그만두고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29명의 아이들에게 매월 3만원씩 후원하고 생일 선물금을 송금한다. 100만원 남짓한 연금의 대부분을 후원금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그래도 그의 후원아동 수는 매년 조금씩 늘어 간다. 그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충북 음성군 소이면의 작은 한옥 집에서 만난 그는 어미 새가 둥지에 있는 아기 새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엄마 되고 싶어요. 가까이 있지 않아도 아이들이 날마다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한국이름은 인진주. 라틴어로 ‘마가레트’가 ‘진주’란 뜻이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스위스 베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스위스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들과 같은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한국어도 배웠다. 1975년, 한국을 처음 찾아 두 달간의 휴가를 보냈다.


“한국은 가난했지만 정이 넘치는곳이었어요. 아이스크림 하나를 열 명의 아이들이 나눠먹고, 수박 한 통을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눠 먹는 모습을 보았어요. 특히 6∼7명이 한 방에 살 정도로 가난했지만 걸인이 구걸을 하면 그냥 보내지 않는 모습에 감동 받았어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돕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1985년 12월, 한국에 정착했다. 광주 영진육아원이 첫 근무지였다. 간호사로 일하며 부모들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돌봤다. 그 후 광주 베텔타운양로원, 울산 울주군의 장애인시설 화정원, 경기도 용인보육원, 전북 군산의 장애인시설 목양원 등에서 20여년 동안 일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장애인, 노인들을 보듬었다. “후원자가 없으면 애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몇몇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어요. 열 살이 조금 넘은 어린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러나 그는 만약 지금 한국에 처음 왔다면 아마 한국에 정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건 ‘엄마의 사랑’이었는데 몇몇 아이들은 돈만 원했다.


“휴대전화를 만들어 줬는데 수백만원이나 되는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아이도 있었고, 유명상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으려는 아이도 있었지요. 돈밖에 모르는 어른들을 닮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이제 한국엔 굶어죽는 아이는 없어요. 좀 가난하게 살지만 오염된 물을 마셔 병에 걸려 죽는 아이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더 가난한 해외아동들을 후원하게 됐어요.”


요즘 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는 건 몽골, 우간다, 말라위,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등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다. 그의 집안 곳곳에는 결연후원아동의 사진과 프로필, 아이들이 직접 그려 보낸 그림들이 걸려있다. 요즘 후원하고 있는 몽골 아이들을 위해 몽골어도 배웠고 몽골에도 벌써 5번이나 다녀왔다.


후원자가 되기보다 엄마가 되길 원하는 그는 후원아동을 선택할 때 미소 짓는 아이보다 슬픈 표정의 아이를 택한다. 아이에게 예쁜 미소를 선물해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가 후원해온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다. 6년 동안 후원하는 우간다의 드보라(14)는 편지를 통해 “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요. 왜냐면 한국에 우리의 엄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아이들의 가난과 외로움을 잘 이해한다. 스위스의 산골마을에서 자란 그의 어린시절 역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저 역시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살았어요. 내가 어른이 되면 나같이 어려운 아이 도와주며 살겠다고 생각해 왔지요.”


그는 2001년 관절염 때문에 간호사 일을 그만두었을 때 6개월 동안 후원을 중단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삶이 너무 의미 없이 느껴져 슬펐어요. 2002년부터 방글라데시, 몽골 아이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살아갈 이유가 생겨 행복해지더군요.”


현재 구세군음성교회에 출석하는 그는 후원아동의 얼굴사진이 담긴 29개의 카드를 매일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아이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이들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는 그는 분명 29명의 엄마였다.


*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